[전원속의 작가들]강화도 동막서홀로 사는 시인 함민복 | ||
"소라를 안주삼아 노을을 친구삼아 한잔술에 취하면 천하가 부럽잖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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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강화도까지 흘러 들어온 것은 전원을 탐해서가 아니다. 지겨운, 혹은 익숙해진 가난 때문이었다. 1996년 대산문화재단에서 창작지원금 500만원을 받았는데, 모처럼 거머쥔 목돈으로 정처를 마련하려다 보니 서울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언젠가 마니산에 올라갔다가 내려다본 광활한 뻘밭 풍경이 생각나 동막으로 왔다. 이곳에서 보증금 없는 월세 10만원짜리 폐가를 얻어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갑갑함을 견디지 못해 하루종일 뻘밭을 걸어 다녔고 산에 올랐다. 몸무게가 20kg이나 줄어들었다. 뻘밭에서 소라 댓 마리를 잡아다가 술안주와 한끼의 반찬으로 삼았고, 겨울철 바닷가에 나가 낚싯대를 드리웠다. 나중에 친해진 마을 청년이 말했다.
“형, 그때는 어떤 미친놈인가 했어요, 겨울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이곳 바다에서 폼을 잡고 있었으니….”
그때는 그곳의 물정을 함민복은 잘 몰랐다. 다만 생의 우울을 그렇게 견디어갈 따름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마을 사람들과 친해져서 정치망 배를 타고 나가 노동력을 보탠 뒤 농어와 숭어 따위를 얻어와 반찬으로 삼으며 동막리 사람들과 한통속이 되었다. 밤 9시 무렵이면 라디오를 듣다가 잠이 들고 새벽 4시쯤이면 눈을 떠서 시를 생각하고 두고 온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하루의 일상을 시작한다.
“형님 내가 고기 잡는 것도 시로 한번 써보시겨/ 콤바인 타고 안개 속 달려가 숭어 잡아오는 얘기/ 재미있지 아느시껴 형님도 내가 태워주지 않았으껴/ 그러나저러나 그물에 고기가 들지 않아 큰일났시다”(‘어민후계자 함현수’에서)
함민복을 만나러 가기 전에 집의 위치를 물었더니 동막교회 아랫집이라고 했다. 정작 그곳에 도착했을 때 교회 아래에는 달동네 철거촌에서나 봄직한 붉게 녹슨 집 한 채가 있을 따름이었다. 다시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가 그 집에서 나왔다. 그동안 전원 속에 사는 작가들을 찾아다녔지만 이토록 낡고 누추한 집은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시인의 얼굴은 밝았고, 안에 들어가 살펴본 환경은 여전히 누추했지만 넉넉한 자유로움이 실내를 흘러 다니고 있었다. 이내 시인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말했다.
“도시에서 아파트 한 채 마련하랴, 식솔들 거느리고 피폐해진 몸으로 족장 노릇을 하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내 입장에서는 성인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물을 나보다 더 넓게 치고 부부관계를 유지하랴 자식들 건사하랴,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남다른 내성과 내공이 필요할 것 같아요.”
생활 한가운데에서, 고통 속에서 삶의 진실을 시로 표현하는 일의 소중함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물론 그렇지만, 결국 체질이 다른 것 아닐까요?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 게 체질이 돼버렸지만 정말 그분들, 지금은 성인처럼 느껴집니다.”
그가 남다른 고독 속에서 성취해낸 ‘자유’는 맹목적으로 부러워할 만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값을 치러야 한다. 학비가 무료라서 수도전기공고를 졸업하고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하다가 도저히 적성에 안 맞아 상경, 서울예전에서 문학을 전공하다가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성선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 그였다. 그는 지난해 펴낸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에서 노모와 둘이서 설렁탕을 먹는데 모친이 설렁탕이 짜다며 국물을 더 시켜 아들 그릇에 몰래 쏟아주던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업처럼 따라다니는 짜디짠 가난의 눈물. 함민복은 그 가난을 오롯이 받아들여 자신만의 자유로 승화해낸 것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시인과 함께 집 앞에 펼쳐진 개펄로 나왔다. 여의도보다 20배나 넓다는 개펄에는 물이 빠진 상태라서 긴 ‘물골’이 수평선 쪽으로 어지럽게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함민복은 개펄의 ‘물골’이야말로 길의 원형이라고 말했다. 육지에 난 물길은 물이 스스로 길을 내어 휘어지고 돌아가면서 강이라는 길을 만들어내지만, 뻘에서는 사람들이 걸어가며 만들어낸 길과 물이 스스로의 본성으로 찾아간 길이 결합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뻘의 물골이다. 그러니 ‘관계’가 만들어내는 것이 길이라는 얘기일 수도 있다. 사람의 길, 곧 운명도 그러할 터이다. 인간의 타고난 속성과 세상이 부여하는 고통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인생의 뻘길. 운명을 탓할 수만도 없고 의지만으로도 개척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의 길인 모양이다.
그는 뻘밭을 바라보며 ‘시 쓰기는 곧 반성하는 행위’라고 했다. 사람들의 살이에서 감동을 느껴야만 그것이 시로 표현됐을 때 읽는 사람도 감흥할 수 있는데, 그 감동이란 자신에게서 부족한 무엇인가를 발견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감동했을 때 자연에는 있지만, 자신 안에는 없는 그 무엇 때문에 감동하는 것이라는 논리다. 함민복은 또 “문명이란 딱딱하고 부드러운 것을 땅속에서 캐내는 작업”이라고도 말했다. 땅속의 딱딱한 것은 수직화시키고 뜨거움은 에너지로 만들어내는 행위가 문명의 속성이라는 성찰이다. 그것은 눈만 뜨면 보이는 뻘밭으로부터 얻어낸 명제다. 그는 첫시집 ‘우울氏의 일기’(1990)에서는 가난과 우울에 대해, 두 번째 ‘자본주의의 약속’(1993)에서는 도시와 자본의 천박성 그리고 대중문화와 문명에 대해, 세 번째 ‘모든 경계에서는 꽃이 핀다’(1996)에서는 나름대로 관대해진 삶에 대한 서정성을 노래했다. 강화도에 정착한 뒤 눈만 뜨면 보이는 뻘밭에서 다시 문명에 대해 깊어진 성찰과 만난 것이다.
그는 8년 만에 금년 여름 4번째 시집 ‘말랑말랑한 힘’(가제)을 문학세계사에서 펴낸다. 땅에서 빌려온 문명으로 거만해진 인간들에 대한 통렬한 반성은 바로 강화도 뻘밭에 빌려온 말랑말랑한 힘에서 나왔다. 곧 선보일 시집에 스며든 그리움 하나.
“천만 결 물살에도 배 그림자 지워지지 않네/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 쉽게 만들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수천 수만 년 밤낮으로/ 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 한객기 대객기/ 소금물 다시 잡으며/ 반죽을 개고 또 개는/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그리움’ 전문)
강화도= 글·사진 조용호기자
/jhoy@segye.com
2004.06.07 (월) 1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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