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장흥 산속에서 작업 도자조각가 신성호씨

바보처럼1 2007. 7. 10. 22:59
[전원속의 작가들]장흥 산속에서 작업 도자조각가 신상호씨
순수한 근원 '아프리카의 꿈'을 그린다
 수집한 연장들을 걸어놓으니 그림이 됐다는 작가. 그가 산양의 이미지를 재창조한 작품 옆에 섰다.
유원지로 잘 알려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장흥리. 그 인근 산속에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 그곳으로 이어지는 길마저 수줍은 듯 숲에 숨어 외부의 눈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동물 형상의 머리가 올라앉은 문기둥만이 입구를 알려줄 뿐이다. 숲길 저만치에 작업장이 있고, 그 옆에 생활공간과 전시장이 잔디밭과 함께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작업실 문앞에서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이가 반긴다. 한국의 도자조각과 도자그림 분야를 이끌고 있는 신상호(57·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장)씨다. 작업장 앞뜰엔 온갖 동물 형상을 한 작품들이 작은 공원을 이루고 있다. 잔디밭과 작업장, 전시장에도 어디서 본 듯한 동물얼굴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뭐라할 수 없는 원시적 분위기가 감돈다. 작가는 ‘아프리카의 꿈’이라 했다. 아프리카는 특정 지역을 뜻하지 않는다. 원초적인 것으로의 지향성을 상징한다. 아프리카야말로 자연과 인간의 근원적 이미지들이 그래도 남아 있는 곳이다. 원시 벽화엔 소나 양들 사이에 춤추는 사람이 등장한다. 추장이 주술적 몰입상태(엑스터시)에서 특정한 동물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그려 놓은 것이다. 동물을 조상으로 여기는 토테미즘과 맞닿아 있다. 재미있는 것은 현대 심리학과 생물학, 지질학이 토테미즘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카를 구스타프 융의 심층심리학과 화석연구, 생물학적 진화론이 이를 말해준다. 인간이 하등 생명체로부터 자연선택과 돌연변이에 의해 장구한 시간을 통해 오늘에 이른 존재라는 점에서 융은 “집단무의식은 인류 진화의 전체적인 정신적 유산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원시인들이 동물을 조상으로 여긴다거나 동물의 영혼과 하나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나 현대인들이 애완동물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는 것은 동물과 인간이 하나의 생명체계로 집단무의식의 깊은 내면에서 교감할 수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다만 먼지 낀 현대인들이 그 순수한 생명의 세계를 상실했을 뿐이다. 작가는 그 먼지를 닦아 생명의 순수한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생명의 시각을 회복하고자 한다. 현대의 비극은 그 생명을 물질로 보면서 시작된 것이다. 작가는 1981년 아프리카 자연에서 영혼의 고향, 생명의 숨소리를 들었다. 폴 고갱이 타히티에서 생명의 순수한 환희를 느꼈던 것처럼. 1995년 런던에서 본 ‘아프리카 미술전’은 피카소 등 현대작가들이 아프리카 원시예술에서 어떤 영감을 얻었는지 공감하는 기회였다. 작가는 아프리카 조각의 원시적 조형요소들을 작품에 자유롭게 반영하고 거기서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때로는 주술적 동물 형상 같기도 하고, 때론 초원을 질주하는 동물같기도 하다. 기하학적 구조체와 결합된 특이한 동물 모양도 보인다. 전시실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동물 머리에 장승 같은 몸체를 한 여러 점의 도자조각 작품은 몰아지경에 빠진 아프리카 추장을 닮았다. 두들기니 쇠소리를 낸다. 고려청자를 굽는 온도인 1250도에서 구워 낸 것이다. 도자조각은 흙이라는 자연친화적 재료에다 색깔과 형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작가는 타 재료보다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쇠 나무 돌은 유연성에서 뒤지고 재료의 기존 색깔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작가는 유리와 브론즈 작업까지 영역을 넓히고 요즘엔 도자그림까지 시도하고 있다. 그는 ‘구운그림’이라 불렀다. 유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여러 장이 모여 큰그림으로 조립되는 벽화작업이 한창이다. 그림 하나하나는 개별적으로도 하나의 작품이 된다. 이런 그의 노력은 지난달 12일부터 오는 9월12까지 열리는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 이스트햄턴의 컬렉션 하우스인 ‘롱하우스 리저브’ 초청전으로 이어졌다. 미국 부자들의 휴가 별장지에서 이뤄지는 명성 있는 전시회다. 동양인으론 일본인 다음으로, 도자분야에서는 3번째 초청전이다. 작가는 1965∼76년 경기도 이천에서 고려청자 이조백자 분청사기로 이름을 알렸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몰려든 일본 관광객들로 재미도 봤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전통도자라는 모순과 허구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 고려청자와 이조백자의 찬란한 역사를 지닌 ‘우리것’을 고수하라는 실체 없는 말에 그 정신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졌다. ‘그 정신과 철학’은 이젠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시대는 변했고 종교만 해도 유교나 불교 중심이 아닌 다종교사회가 아닌가. ‘우리’로 대표되는 한국적인 것, 한국의 뿌리를 가진 것은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말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우리는 ‘나’와 달라 복수다. 때에 따라서 ‘나’가 숨어버리는 곳이다. 예술은 ‘나’지 ‘우리’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것, 한국적인 것의 지나친 자긍심은 객관과 이성을 잃어버리게 만들 뿐이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시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장인정신도 수공업사회와 농촌협업사회에서 필요했던 덕목이라는 얘기다. 대량생산과 정보화 사회에선 새로운 것은 만들어 내는 창의력이 더 요구된다는 것. 창의력과 장인정신이 혼돈되는 시점이라는 설명이다. 30년 전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 한 후 작가는 습관처럼 아침 시간 뒷산을 한바퀴 돈 후 동물작품 소공원 속을 어슬렁거린다. 인간의 유전자 원형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양새다. 또다른 진화를 꿈꾸는 것은 아닐까. 누운 평상 위로 바람이 지나간다. 몸에 스르르 안기는 공기의 촉감이 좋다. 전원생활의 맛이 이런 것일 게다. 장흥=글 편완식, 사진 김주성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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