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경기도 광주군 실촌면서 작업도예가 김기철 | ||
자연과의 교감을 도자로 풀어낼 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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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풍광을 그대로 빨아들이는 2층 거실에 들어서니 들국화 향기가 진동한다. 진원지는 천장에 걸어 놓은 꽃뭉치. 주인은 그것을 살아 있는 샹들리에라 했다.
27년 전 이곳에 정착한 작가는 손수 농사지어 자급자족하는 삶을 산다. ‘터서리’엔 야생화를 심고 연못을 만들어 연꽃도 키우고 있다. 용가마(전통가마)와 소나무 장작, 그의 생활 모습에서 옛 도공의 환생을 보는 듯하다.
작가는 울안에서 나무나 화초를 가꾸거나 밭고랑에 앉아 잡초를 뽑는 것이 체질이라 했다. 도자기 역시 기분나는 대로 흙장난을 하는 모양이 그의 천성인 것 같다.
어린애가 된 기분으로 흙을 가지고 논다는 그는 농사를 통해 자연과 교감된 것을 도자로 풀어낼 뿐이라고 말한다. 몸속 구석구석 스며 쌓인 자연이 저절로 손끝으로 빠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무작정 흙과 씨름할 때 흙과 가까워지고 흙이 말을 들어준다. 어느 순간 흙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일 때도 있다. 마치 산에 올라 꽃을 꺾을 때 저만치 있는 꽃을 보고 그 자리에 가 서면 더욱 아름다운 것이 좀 떨어진 곳에 미소짓고 있는 것과 같다.
결국 작가의 도자기는 집 안팎에서 만나게 되는 친숙한 자연을 가슴으로 보듬어 만든 모습이다. 옥잠화, 모란, 연꽃, 청매화, 함박꽃, 그리고 수많은 야생화의 꽃잎과 열매들을 소재로 삼으며 그 위에 앉아서 노래하는 청개구리와 풀벌레마저 연적으로 빗어냈다.
형태미와 실용성의 조화뿐 아니라 작가는 꽃잎이 바람에 날리듯 살아 숨쉬는 것 같은 도자기를 최고로 친다. 물레에서 떼어놓은 둥근 형태의 정물이 아니라 열 손가락을 마음대로 움직여 형성한, 균형이 깨진 듯한 제멋대로의 모양으로 태어난 것을 말한다. 불균형 속에 균형을 잡는 자유로운 특성을 지닐 때 어엿한 도자의 형태를 지니게 된다는 논리다. 여기에 해학이 깃들면 금상첨화다. 자연의 형태이면서 추상미를 내포하는, 생동하는 예술품으로 탄생되는 것이다.
작가는 전기·가스가마를 안 쓴다. 용가마 불쏘시개로 우리 소나무를 고집한다. 이 땅의 자연과 인간의 공동작업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 그을음은 은은한 색으로 변하고, 동시에 흙속의 산소를 빨아들여 태우면서 맑은 백자를 만들어 낸다.
작품에서 겉면의 자연색과 안료를 바른 안쪽의 백자는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다.
때마침 작업실을 방문한 시카고박물관 동양담당 쉬제(許杰) 큐레이터는 그의 작품에 대해 “전통을 바탕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현대성을 구현하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대영박물관, 버밍엄박물관, 시카고박물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될 정도로 그는 이미 유명 작가 반열에 올라 있다.
작가는 6·25 때 고향으로 피란가 농사짓던 경험에서 평생 흙에 대한 향수병을 키웠다. 대학 졸업 후 교단에 서면서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불편함을 감수하고 결혼 후 변두리 텃밭이 딸린 집으로 이사를 갔을까. 꽃과 나무를 키워 꽃집으로 불릴 정도였다.
화분을 옮기다 허리를 다쳐 휴직하던 중, 도자를 배우던 아내 친구가 갔다준 청자 흙 한 덩어리가 그의 운명을 바꿨다.
꽃병 술병 단지 등을 장난삼아 해봤는데 재미가 붙었다. 보는 사람마다 손재주가 있다고 칭찬했다.
얼마 후 우연히 일사 김봉룡의 고희 회고전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여태껏 인생을 헛살았구나 하는 절박한 좌절감에 눈앞이 캄캄했다. 동양자수와 같은 나전칠기 문양은 신묘한 인간의 위대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꽃이나 나무 키우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무엇을 만들어 남에게 감동주는 것 이상의 것은 없어보였다. 40대 중반에 도자에 매달리기로 하고 도요지를 찾았다. 배우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공간대상전을 수상, 예술적 기질을 보여줬다.
그의 유일한 바람은 맑은 공기와 샘물, 울창한 숲과 넓고 시원한 마당이 수시로 기쁨을 주고, 농사지은 신선한 채소와 곡식으로 배 안 곯고 소박하게 살면 그만이다. 작업실에 어둠이 내리자 불지핀 가마 속에서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다. 망아지처럼 날뛰던 불길은 고삐가 잡히고 연한 저녁노을 빛깔이 차분히 흐른다. 희다 못해 파르스름한 물안개 같은 불길이다. 밤이 깊어 풀벌레 소리마저 잠들 때가 되자 죽음 같은 적막 속에서 오직 장작불 제 몸사르는 소리만 바지직바지직 들린다. 고통을 못 견뎌 발광하는 듯한 불의 요동. 무수한 생명이 태어나려면 이 정도의 진통은 겪지 않겠는가. 무서운 불춤이다.
새벽녘에 이르러서야 불이 꺼지고 열기가 아쉬운 여운으로 가마 둘레를 감돌며 아른거린다. 그 옛날 흥부의 박 속에서 금은보화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듯이, 작가는 이번만은 귀한 옥동자들이 줄줄이 얼굴을 내밀고 나오리라 기대해 본다. 다 부질없는 욕심인 줄 알면서도.
11월4일까지 세오갤러리에서 개인전 (02)522-5618
글 편완식, 사진 허정호기자
/wansik@segye.com
2004.10.18 (월) 16: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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