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공주 장기 초등학교 교장 시인 나태주

바보처럼1 2007. 7. 11. 05:14
[전원속의 작가들]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 시인 나태주
가을은 시인을 애태우며 못살게 굽니다
 ◇학교 담장 너머 교회를 배경으로 가지가 잘린 은행나무 아래 서 있는 나태주 시인. 그는 가지가 잘린 채 홀로 서 있는 은행나무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되뇌었다.
그날, 충남 공주의 가을은 마지막 절정에 올라서 있었다. 초등학교 운동장 구석에 가지들이 짧게 잘린 채 고적하게 서 있는 은행나무의 이파리들도 이미 노랗게 익어버렸고, 온통 붉은빛으로 타고 있는 산딸나무도 그날이 가을의 절정임을 알리는 증좌였다. 그렇지만 공주시 장기면 장기초등학교 교장 나태주(59) 시인을 만나러 간 그날, 단풍보다도 가을의 느낌을 더 섬세하게 전하며 시인의 가슴속 떨림판을 자극한 것은 희미하고 누렇게 교정을 덮어버린 가을 오후의 사양(斜陽)이었을 것이다.

“똑바로 보지도 않고 옆으로 희미하게 쳐다보는 듯한 가을빛은 사람 애간장을 다 태우지요. 갈 것은 가게 하고 올 것 오게 하며 설 것은 서게 하고 앉을 것을 앉게 하는 자연의 대긍정이 진행되는 중이겠지만, 나는 이 가을이 빨리 갔으면 좋겠네요. 차라리 겨울이 오면 추워서 콜록거리기라도 하지요. 때로는 질병도 생을 위로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가을의 중심에 맑은 정신으로 서 있으면 시가 찾아와서 정신없이 나를 휘둘러요.”

시가 언제 찾아드냐는 질문에 나태주는 손님이 찾아오는 때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듯이 그에게 시는 잠잘 때도, 화장실에 있을 때에도, 출근길에도 때를 가리지 않고 온다고 했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주로 가을에 시가 더 몰려왔는데 요즘은 가뜩이나 허전하고 매사에 자신이 없어져서 시에 휘둘리기가 힘들다고 했다. 시에는 막강한 힘이 있어서 시인이 시를 휘어잡을 수 없고, 시인은 그저 시에 휘어잡힌 사람이요, 시의 그릇일 뿐이라는 말이다.

바람 부는 날 나무들이 휩쓸리듯 시에 휩쓸리는 존재가 바로 시인이라는 생각이다. 유난히 떨림판이 예민한 존재인 시인들이 시에 휩쓸리는 건 행복이지 않을까. 그러나 몸과 마음이 강건하게 시의 폭풍을 견디어낼 조건일 때 태풍이 자고 난 뒤 많은 소출이 있을 터이지만, 나태주는 지난해 병을 앓았고 요즘은 몸을 추스르면서 회갑을 앞두고 자꾸만 삶을 정리하는 듯한 심정이 되면서부터 시의 폭풍도 그리 달갑지만 않은 듯하다.

나태주는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시단에 나와 시업 30여년째요, 19세부터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했으니 교직은 만 40년째 이어오고 있다. 경기도 연천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해 그의 고향인 충남 서천 인근을 거쳐 공주에 정착했다. 전원 속의 시인이자 교사로 살아온 셈인데, 그를 이른바 ‘전원 속 작가’라는 틀에 가두자면 정작 그가 살아온 지역보다도 그의 시가 평생 추구해온 전원 정서가 그를 더 강력하게 특징짓는 요인일 것이다.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히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대숲 아래서’ 부분)

아이들이 그네를 타거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가을 오후 장기초등학교 교정을 배회하다가 교장실에 들어섰을 때 음악 소리가 아담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시 몇 편을 암송하며 자탄하듯 말했다. 내 시는 초기 시로부터 지금까지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어쩌면 시인에게 시는 ‘단벌’일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시를 크게 달라지게 할 힘을 지닌 시인은 별로 많지 않다고. 그래서 자신이 없다고. 그의 이러한 자조는 역설적으로 온갖 해체시니 관념시들이 난무하는 속에서 오로지 전통 서정시에 매달려 한생을 지나온 외로움과 소외의 심정을 강변하는 발언이었을 것이다. 이런 시가 그의 ‘서정’의 외로움을 대변한다고 보면 어떨까.

“다른 아이들 모두 서커스 구경 갈 때/ 혼자 남아 집을 보는 아이처럼/ 모로 돌아서서 까치집을 바라보는/ 늙은 화가처럼/ 신도들한테 따돌림당한/ 시골 목사처럼.”(‘서정시인’)

그렇지만 다분히 그의 ‘시단의 외로움’에 대한 강변은 ‘엄살’일 수 있다. 그는 한국 전통 서정시의 한 맥락을 충분히 지켜오면서 문단에서 뚜렷한 위상을 확보했고,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흙의 문학상’ 등 많은 문학상들이 그의 노고를 위로해준 터이다.

그는 서천에서 태어나 공주에는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되는 공주사범학교에 다니기 위해 처음으로 유학왔다. 이후 연천과 서천 등지를 돌다가 공주에 정착한 지 벌써 28년이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공주에 살면서도 공주가 그립다고 했다. 공주는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 곳으로 청명한 대기 속에서 먼 곳의 풍경까지 보이는 지세여서 늘 ‘높고 쓸쓸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는 그리워하는 마음을 공주에서 배웠다.

“그리움과 기다림은 다른 정서입니다. 기다림은 예전에 있었는데 없어진 것을 되찾기 위한 심리적 작용이지만, 그리움은 예전에 있었기도 하지만 한번도 없었던 것일 가능성이 크고 기다림보다 구체적이지 않은 뜬구름 잡는 감정입니다. 인간을 끝없이 못살게 구는 건 기다림보다 그리움이지요. 그리움은 무엇이 자신에게 결핍된지도 모른 채 끝없이 애달파하는 감정인데, 인생의 애달픈 면은 그리움에 있고 시는 그 그리움에서 출발합니다.”

시인도 시인 나름이겠지만, 기본적으로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축복받은 것이라기보다는 세상의 모든 것에 더 특별히 예민하게 상처받고 반응하는 고달픈 일인지도 모른다. 나태주는 자고로 예술가란 조울증 환자가 아니면 정신분열증 상태라고 말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이야말로 그 선명한 증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교장실에서 나와 공주시내 금강변 음식점에 들렀을 때 그는 고복수의 ‘짝사랑’을 잠시 읊조리면서 눈물지었다. 자신은 세상과 사람을 평생 짝사랑해왔을지도 모른다며, 하지만 세상의 누군가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 반응했을지도 모른다며, 그렇게 노래를 낮게 불렀다.

“젊어서 곱살했을 한때는/ 한약방 집 첩실이었던 아낙/ 지난해 겨울, 팔을 다쳐/ 붕대로 팔을 묶어 어깨에 메고/ 전실 아들이 대신해서 살고 있는/ 남편네 집 앞길을/ 어슬렁어슬렁 지나가고 있다// 상한 짐승이 되어”(‘백목련’)

하지만 나태주 시인을 여리고 여린 시인의 캐릭터로만 보는 것은 다른 일면을 보지 못한 왜곡일 수 있다. 헌신적으로 교직에 봉사해 최고의 자리인 교장까지 올랐으며, 딸 민애(26)씨는 서울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아버지의 대를 이어 시를 연구하는 박사과정에 들어서 있고, 내년 회갑을 앞두고 제자와 지인들이 준비한 회갑문집이 곧 나올 예정일 뿐 아니라 다음달에는 학교 두 칸짜리 교실을 튼 식당에서 조촐한 출판기념회도 열린다. 이처럼 현실적으로 자신과 주변을 갈무리하는 힘은 시인의 생래적인 여린 감성을 보완하는 또 다른 자산일 것이다.

어둑한 금강변을 걸어 다리를 건널 때 공산성 위에 떠오른 반달이 시인의 발치를 비추고 있었다. 그는 2∼3년 전부터 그림을 그려서 시화전도 준비하는 중이며, 동화를 쓰기 시작해 다음달에는 ‘외톨이’라는 연작동화도 선보일 예정이다. 자신이 바로 그 동화의 주인공 외톨이라고 했다. 사실 시인은 알고 있다. 자신의 외로움이야말로 타인의 외로움이라는 것을. 23번째 시집 ‘산촌엽서’에서 실린 그의 고백.

“남의 외로움 사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제 외로움만 사 달라 조른다/ 모두가 외로움의 보따리 장수.”(‘시인학교’ 전문)

공주=글·사진 조용호기자/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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