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과 씨름한 지 서너 시간이 흘러서야 허기를 느낀 작가가 찬밥에 김치 몇 조각으로 끼니를 때운다. 산 아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명상에 잠겨 있던 작가가 이내 작업대에 다가앉는다. 화폭에 무슨 한이라도 풀듯 붓질 소리만 허공에 감돌 뿐이다. 해는 벌써 서산을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뱃속의 꼬르륵 소리를 듣고서야 작가가 시장기를 느낀 듯 밥을 챙긴다. 하루 두끼 식사가 전부다. 배고프면 먹는 식이니 밥 때가 따로 없다. 하루 세끼를 챙겨 먹던 시절보다 오히려 건강해졌다. 해가 뜨고 지는 것에도 얽매임이 없다. 몸이 시키는 대로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는다. 이상원(69) 화백은 산에 자신을 가둬 진정한 자유인이 됐다고 말한다. 춘천에서도 1시간 거리. 오봉산 배후령고개를 넘어 양구 접경에 위치한 산골마을 오항리는 행정구역상으론 춘천 북산면에 속한다. 건강에 좋은 중산간 지역이라 90세 이상 노인들이 많다. 예로부터 자연사는 있어도 병사(病死)가 없는 동네로 알려져 있을 정도. 예전엔 인근에 파월장병 훈련소가 있었을 만큼 산세가 험준한 지역이다. 작가의 작업실은 마을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 있다. 옆으론 계곡물이 흐르고 정자 하나가 세워져 있다. 여름엔 개울물 흘러가는 소리에 취해 낮잠을 청해 보는 곳이다. 작가는 더 일찍 이곳에 내려오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공기와 물보다도 이런저런 인간 잡사에서 멀어지니 잡념이 사라져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어 좋다. 옆에서 보기엔 너무 단조로운 생활이라 싫증이 날 법도 하다. 하지만 적적하거나 무료하거나 고독할 틈이 없다. 어쩌다 들르는 아내조차도 오죽했으면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해야지”라며 팔자라고 했을까.
![]() ◇인물화는 그리면 그릴수록 소재가 무궁하다는 이상원씨가 퀀셋으로 만든 작업실에서 그가 만난 인물들을 재구성해 형상화 하고 있다. 그는 산골마을의 단조로움이 오히려 잡념을 없애 주는 약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이제야 겨우 예술세계에 눈을 떠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철이 드는 것 같다고 할 정도. 그림이 보이기 시작하니 할 것은 많고 시간 없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남은 삶이 그다지 길지 않음을 요즘처럼 절실히 느낀 적이 없다. 추석 등 명절 때도 가족들을 작업실로 부르는 한이 있어도 화폭을 떠나지 않는다. 대문호 톨스토이가 죽기 얼마 전에 쓴 일기에 “이제 작품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다”고 적은 심정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다. 그림이 설설 풀릴 땐 날이 새도록 화폭에 매달린다. 아쉬움에 그림 손질을 하다 보면 날이 훤히 밝기가 일쑤다. 그래도 그림에 취해보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다. 이젠 돈도 명예도 부질없다. 그저 “저 사람 참으로 환쟁이다”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꿈이다. 작가가 외출할 때는 춘천 막국수가 생각나거나 동해안 스케치를 떠날 때이다. 새벽 3시. 오랜만에 스케치 채비를 갖춘 작가가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먼동이 틀 무렵 동해안 부둣가 사람들을 접하기 위해서다. 바쁘게 돌아가는 선착장 사람들 얼굴엔 삶이 녹아 있다.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악다구니를 하는 사람에서부터 삶의 무게를 잔뜩 짊어진 모습까지 다양하다. 잡은 고기를 내리는 어선 곁에서 개평 하나 달라고 소리지르는 동냥 할머니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포착하기 위해 두 달간 쫓아다닌 적도 있다. 작가는 각양의 표정을 마음속 스케치로 담아둔다. 감동적인 장면만을 모아 편집해 낸 것이 그의 인물화다. 실재인물은 아니지만 더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할아버지를 그리고 나서 옆에서 웃어주는 할머니를 배치하기도 한다. 인물의 분위기는 머리카락으로 구현해 낸다. 내면을 드러내는 데 머리카락만큼 좋은 것이 없다. 머리카락 부분은 훌륭한 추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이미지의 드라마틱한 요소는 영화 간판쟁이 시절 터득했다. 어린 시절 연필화로 주위사람들의 인물화를 그려주면서 천재소리를 들었지만,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한 그는 이제 영화간판이 스승이 된 셈이라고 담담히 말한다. 숨기기보다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최근엔 인도 여행 때 만난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죽음을 가까이 받아들이는 그들의 선 굵은 표정에 흠뻑 반했다. 작가에게 인물은 하면 할수록 빠져드는 노다지나 다름없다. 그림이 살아날 때의 흥분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 그는 얼굴 이외의 부분은 과감한 생략법을 구사해 사실과 추상의 조형적 긴장감을 유발해 상승작용을 불러일으킨다. 구상 속에 추상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바퀴 자국, 해진 동아줄과 마대, 찢어진 신문지 조각, 주름진 얼굴 등을 즐겨 그려 왔다. 모두가 세월의 흔적들이다. 결국 작가는 ‘세월의 실경산수’를 걷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는 우윳빛 러시아 미인들과 갯벌 위 누드 모델도 그릴 예정이다.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해외 유명 미술관에서 이미 초대전을 가졌을 정도로 그는 독학 그림인생의 고독을 넘어 국제작가로 입지를 굳혔다. 작업실 안마당에 심어 놓은 소나무 자라는 모습이 미인보는 것보다 좋다는 그가 건강식으로 지하실 독에 묻어둔 무를 꺼내 입에 문다. 영락없는 산 사람이다. 글 편완식, 사진 이제원 기자 wansik@segye.com |
2004.12.13 (월) 1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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