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시인이 상찬한 그 시인의 이름은 황명걸(69)이다. 1976년 펴낸 첫 시집 ‘한국의 아이’로 시단에 깊이 각인됐던 황명걸의 이미지를 그의 벗이 ‘은백양 또는 자작나무’에 비유했던 까닭을 그를 직접 만나보니 알겠다. 황명걸과 신경림은 똑같이 칠순에 접어든 같은 연배의 친구이지만, 여전히 동안(童顔)의 이미지가 지배적인 신경림에 비해 황명걸은 머리칼은 물론이고 수염까지 모두 은발이었다. 넓은 응접실의 통유리창 곁 안락의자에 앉아 그는 창밖에서 비껴드는 오후의 양광 아래 앉아 있다. 햇빛이 그의 은발에 부딪쳐 잘게 부서진다. 창밖으로는 개울이 흘러가고 개울가에는 무성한 갈대가 바람에 몸을 뒤채는 중이다. 황명걸이 경기도 양평군 북한강가로 처음 이주하는 것은 1991년 무렵이다. 벌써 15년째 이곳에서 살아가는 중인데, 지금이야 800여명의 예술가들이 양평군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고 있다지만 그때만 해도 그가 이른바 ‘중앙문인’들 중에서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온 문인이었다. 평양 대동강가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 후 진주한 소련군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친을 따라 월남해 서울고등학교, 서울대 불문과 수료, 동아일보 기자, 자유언론운동으로 인한 해직(1975), 재벌기업 근무 등의 이력을 남기고 생계 일선에서 은퇴한 뒤 그가 찾은 곳이 이곳이었다. 고향의 강물을 닮은 북한강가로 스며든 것이다. “양평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습니다. 내 취향이 도회적인 편인데 시골에 들어와 살다보면 도회정서의 부족한 면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도 있었고, 또 서울에서 할 일도 없었을 뿐 아니라 내 고향의 강물을 닮은 곳에서 남은 생을 보내고 싶었던 거지요.”
하지만 그의 부친은 미술은 천한 장르라는 선입견을 지니고 그의 미대 진학을 강력히 반대했다. 고교시절 그의 은사 중에는 황순원 조병화 등의 문인이 있었고 그 영향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불문과 진학으로 부친과 타협하면서 내심 문학을 하면서 미술평론 쪽에 마음을 두었다. 하지만 시를 써보니 시가 좋았다. 서울대 문리대 교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에 몰입했다. 대학생활 내내 학문에는 뜻이 없었다. 전후 막 복구되기 시작한 명동에서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세월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나중에 ‘돌체’로 바뀐 클래식 음악다방 ‘엠플레스’에서 친구들과 만나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눈이 오면 또 눈이 오기 때문에, 날씨가 흐리면 흐린 탓에 그들은 술을 마시며 문학과 인생과 시대를 논했다. 결국 그는 대학 졸업장은 받지 못했지만, 1962년 ‘자유문학’ 신인상에 ‘이 봄의 미아’가 당선되면서 시인의 명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북한강가에서 살면서 평생 가슴속에 묻어온 미술에 대한 짝사랑을 화랑카페 ‘무너미’를 여는 것으로 대신했다. 생계에도 보탬이 될 겸, 강가의 살림집을 개조해 그림을 보면서 차를 마시는 집으로 개조한 것이다. 지금이야 서종면 문호리 북한강변에 카페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이른바 문호리 카페촌이 형성돼 있지만, 그 효시가 ‘무너미’였다. 하지만 이 카페는 3년을 넘기지 못했다. 농지법과 위생법 위반 명목으로 허가가 나지 않은 채 운영되던 카페는 끝내 그가 여주 구치소에서 한달 동안 구류생활을 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다시 옥천면 남한강가로 옮겨 ‘어린 왕자’라는 카페를 더 운영하다가 그는 2년 전에 이곳 수능면 산 속으로 들어왔다. 그가 사는 집은 카페용으로 지어졌던 흙집인데, 넓은 홀을 응접실 대신 사용하고 있고 구석에는 장작을 때는 벽난로가 붙어 있다. 50여 년 해로한 그의 동갑내기 아내 서상실씨가 마침 불을 지펴놓아 훈훈하다. “아침이면 산자락에 골안개 걸치고/ 낮에는 쏠비알 물소리 귀청을 씻는/ 산간 외딴집/ 밤이면 칠흑 속에 불 하나가/ 가물거리며 밤을 지샌다/ ……/ 내 유년의 반짝이는 요정은 날지 않고/ 소년기의 벗이었던 개똥벌레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 넋이 유성으로 흘러 사라져 좋으련만/ 나는 골방에 숯검정으로 남아 앉아/ 계속 딱한 몽매로다” 데뷔 42년 만에 최근 펴낸 세 번째 시집 ‘흰 저고리 검정 치마’(민음사)에 수록된 ‘무망(無望)’이라는 시편에서 산중 생활을 그는 이렇게 묘사했다. 그에게 시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시와 멀어졌고 해직 후 첫 시집을 냈지만 다시 생계를 위해 재벌기업에 근무하면서 다시 시는 그를 떠났다. 은퇴 후 양평에 정착한 뒤 두 번째 시집 ‘내 마음의 솔밭’(1996)을 낸 지 8년 만에야 세 번째 시집을 상재했다. 시력에 비하면 엄청난 과작인 셈이다. “시는 써서 무엇하나/ 회의하며 괴로워하며 울며/ 시를 멀리하였다/ 정나미 떨어져 상판도 보기 싫은 적이 숱했지만/ 미운 처 내치지 못하듯/ 연을 끊지 못하고 미적미적 예까지 왔다// ‘시는 마음의 병통이 되기 쉬우니/ 모름지기 삼가는 것이 마땅하다’/ 남명 조식 선생의 곧은 심지도 없이/ 물욕에 눈 어두워 외도에 빠지고/ 천성이 게을러터져 작시에 뜸했으니/ 억울해 할 이유가 없다. 후회는 할 자격이 없다/ 모든 것은 사필귀정/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 그는 이번 시집에 수록된 ‘세한도(歲寒圖)를 보며’에서 이렇게 자신의 게으름과 시에 대해 충실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생계라는 이름의 ‘물욕’을 원망한다. 하지만 누구를 막론하고 생계를 위해 생업에 종사하는 일이란 경건하기까지 한 것이고 보면, 그것은 변명에 가까울 터이다. 오히려 시에 대한 그의 지극한 애정이 시를 사랑하고 내치고 다시 붙드는 ‘사랑싸움’ 같은 인생길을 내왔던 것 같다. 그는 이번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솔직한 심경을 밝혀 놓았다. “어떻게 하면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절창을 뽑아낼 수 있을까 나름대로 여지껏 노심초사했으나, 나는 꺽꺽 쉰 목에 지독한 음치였다. 따르느니 낙담뿐, 시업의 포기에까지 내몰렸었다. 하지만 시와의 인연의 끈은 끈끈하고 질긴 것이어서, 미련퉁이처럼 목매여 예까지 끌려왔다.” 아직도 그림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지만 이제 그림을 시작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끝내 붙들지 못한 애인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간은 남아 있다/ 아, 나 깨끗한 종생을 준비할 때”(‘참회’)라고 읊지 않았던가. 흙집을 나서 길가로 따라나온 그의 은발이 개울가의 갈대를 배경으로 바람에 날린다. 개울가의 시인은 ‘은백양 혹은 자작나무’처럼 시야에서 서서히 멀어져갔다. 희미해지는 은백양 둥치쯤에서 ‘허연 상처’가 훈장처럼 빛나는 중이다. 양평=글·사진 조용호기자 jhoy@segye.com |
2004.12.20 (월) 1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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