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전남 장흥 폐교서 사는 화가 유승우

바보처럼1 2007. 7. 11. 05:32
[전원속의 작가들]전남 장흥 폐교서 사는 화가 유승우
자연의 리듬에 붓을 맡기련다
 ◇8200평의 폐교에서 홀로 작업하며 무심의 경지를 터득해 가고 있는 유승우.
대숲을 사납게 휘젓고 지나가는 거친 바람소리가 스산하다. 폐교의 텅빈 운동장처럼

휑한 가슴을 주체할 수 없게 하는 겨울 밤이다. 작가가 물을 끓여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며 명상에 잠긴다. 폐교에 화실을 차리고 작업하면서 그가 배운 것이 차다. 정신적인 빈곤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벗이자 부질없는 욕망을 녹이는 데 아주 긴요한 약이 됐다. 화실을 가까이 감싸고 있는 수십년생 유자나무와 치자 그리고 인동꽃 향기가 차에 향을 더해 왔다.

스쳐 지나가는 객들에겐 다소 감상적인 이런 풍경들은 화가 유승우(57)가 머물고 있는 전남 장흥 남송분교에서 벌어지는 자연과의 놀음이다. 그는 이 폐교에서 수년째 홀로 살고 있다.

외부와 거의 절연되다시피 살면서 세상과 만날 수 있는 것도 차를 통해서다. 차는 그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가장 손쉬운 언어가 됐다. 지나던 스님들은 물론이려니와 지인들 또한 차를 핑계로 심심찮게 폐교를 찾는다. 그들 중에는 소설가 송기숙과 한승원도 끼여 있다.

그와 20년 지기인 한 평론가는 방명록에 이런 시를 남겼다. “땅거미 밟고와/ 차향(茶香) 사이에 두고/ 이십년 우인(友人)과/ 시간을 토막내는 사이/ 댓잎 하나/ 호젓이/ 예인(藝人) 물위에 눕네.”

폐교라는 이름엔 서글픈 정서가 담겨 있게 마련. 사람들이 그 낡은 시간 속에 파묻혀 사는 그를 찾는 것은 도회지와 완벽하게 차단되는 공간에 지친 심신을 풀어놓고 싶은 까닭이리라. 폐교라는 퇴락한 우수 속에 심신을 맡기면서 잠시 자연의 샤워를 즐기고 가려는 것이리라.

작가는 자연의 가르침에 충실히 훈도되는 제자이기를 바란다. 그러한 과정에서 습득된 야성으로 붓을 쥔다. 그의 그림 속에서 보여지는 이미지와 정서는 모두가 자연에서 솎음질한 것들이다. 바꿔 말해 그의 그림은 정제된 자연의 이미지를 받아쓰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자연에 깊숙이 들어가 그로부터 비롯되는 아름다운 정서에 감염되고자 한다. 그의 그림은 친근하지 않은 이미지로 채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림에서 현실적인 이미지만 탐하지 않는다면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기 어렵지 않다. 야성으로 춤추는 ‘붓 너울’이다. 자연의 리듬에 맡기는 춤사위라 할 수 있다.

작가는 1987년 학교(중앙대)를 사직하고 서울을 떠난다.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아내를 남겨두고. 아니다 싶은 세상과 맞서기 위해서다. 이곳저곳을 떠도는 낭인 생활과 세상에 대한 울분은 차츰 그의 몸과 마음을 황폐화시켰다. 그는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에서 지리산 자락에 들어가 노동으로 삶을 껴안았다. 술도 멀리하며 목부 노릇에 충실했다. 밤이면 18만평에 달하는 목장에 홀로 남아 자신과 정직하게 마주했다. “너는 왜 여기에 와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산바람이 다시 화필을 들어 세상과 화해하라 했다.

폐교에 자리를 틀고 화폭과 정면으로 대결했다. 지우고, 또 그리고, 다시 지웠다. 세상에 대한 원망이 소멸됐다. 이젠 사람들이 보고 싶다. 20년 가까이 등돌렸던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젠 남들이 친구가 돼준다면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도 괜찮을 듯싶다. 그는 “오늘을 제대로 잘 살자”고 다짐한다. 사람들이 내일을 위해 살려고 하니 욕심이 생기고 치장하게 됨을 깨달았다.

작가가 사물놀이 장단에 춤을 추듯 화폭을 두드리고 때린다. 수묵화의 갈필과 유사한 형태로 나타나는 거친 붓 자국은 사뭇 역동적이다. 더불어 리드미컬하다. 거친 가운데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형국이다. 그처럼 강함과 부드러움이 함께하는 양면성은 시각적인 아름다움으로 변환한다. 연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타악기의 리듬이 몸과 마음을 흔드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하듯이,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크고 작은 무수한 붓 자국도 그와 유사한 감흥을 유발한다. 얼씨구 흥에 겨워 절로 들썩거리는 어깨춤과 같다. 붓 너울, 붓결 장단에 찍 하고 찍 하면 캔버스에서 무언가가 저절로 드러난다.

그의 작업은 학교 교실에 마련한 차실의 바닥에 깔아 놓은 멍석을 떠올리게 하는가 하면, 차실 옆에 위압적으로 밀집해 있는 대밭의 대바람 소리를 시각화한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보면 크기가 다른 돌들이 리듬을 가지고 조화를 이룬 돌담의 이미지, 돌담의 결처럼도 보인다.

그는 폐교 교실 6개를 작업실로 쓰고 있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큰 작업실을 가진 작가일는지 모른다. 복도에도 그림이 내 걸려 있어 작은 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1984년 개인전 이후 20년 만에 내년 2월 22일∼3월4일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갖는 그는 요즘 화필에 신명이 났다. 점심마저 떡으로 때우며 작업에 몰입해 있다. 57년 생애 중 요즘처럼 행복한 적이 없다며 그가 환하게 웃는다. 자연조차도 놓아버리는 홀연 자유로운 초법의 경계, 진정한 자유인을 그가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 온 아이처럼 서울에 있는 아내에게 그가 자랑스럽게 전화를 했다. 이제 그림이 풀린다고.

장흥=글·사진 편완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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