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지킴이

영원한 신라인 김태중씨

바보처럼1 2007. 7. 24. 11:24
[이 사람의 삶]"신라 천년 고도 경주는 세계의 경주 되어야"
'영원한 신라인' 김 태 중씨
“경주는 경주 시민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경주이고 세계의 경주여야 합니다.”

‘영원한 신라인’으로 불리는 천년고도 경주의 원로 향토사학자인 김태중(76) 전 경주문화원장은 경주를 지키고 살리기 위해 평생을 살아 왔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후학을 양성하고 경주를 문화 역사의 보고로 만드는 데 힘쓰겠다”는 게 김씨의 다짐이다.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김 전 원장은 2살 때 경주로 이사오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주를 떠나지 않았다. 초·중·고를 경주에서 마친 뒤 경북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경주로 돌아와 교편을 잡았다. 신라의 숨결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낸 김 전 원장이 신라문화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면서부터.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남다른 소질을 가졌던 김 전 원장은 학교에서 역사뿐 아니라 미술도 가르쳤다. “두 과목을 가르쳤기에 옳은 선생이 되지 못했다”고 겸손해 하는 김 전 원장은 교편을 잡은 뒤 역사와 고대미술사 등을 파고들면서 신라문화에 흠뻑 빠졌다.

경주인이라는 자부심을 담고 있었던 김 전 원장은 1956년 전쟁의 폐허 속에 경주의 문화계 인사·학자들과 함께 신라문화동인회를 만들었다. “전쟁으로 심한 피해를 입은 문화재를 사랑하고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이 몇몇 뜻 있는 경주 인사들과 함께 신라문화동인회를 발족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신라문화 지킴이’로 유명한 고청 윤경렬(1916∼1999) 선생과 고 이상구 변호사 등 8명과 함께 만든 신라문화동인회는 지금까지 지역의 역사·문화·향토사를 연구하고 자료를 보존하는 일들을 왕성하게 펼치고 있다.

◇경주가 자랑하는 세계적 문화유산인 남산 마애석불(사진 왼쪽)ㆍ첨성대

젊은 시절 김 전 원장과 함께 유적답사에 심취했던 다른 친구들은 가정 생활이 순탄하지 않았던 것이 생각난 듯 “지금 생각하면 나는 운이 너무 좋았다”며 부인 김영혜(73)씨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라문화에 푹 빠져 주말과 방학 때마다 유적답사를 한답시고 경주 주변을 찾아 헤맬 때 부인 김씨는 단 한마디 불평을 하지 않고 오히려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었다. 김 전 원장의 급여는 대부분 연구활동과 유적답사, 전문서적 구입 등에 사용되고 생활비는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인이 떠맡았다.

“2남1녀의 자식들도 모두 엄마를 닮아 나의 유적답사와 문화연구활동을 이해하고 지원하는 든든한 후원자”라고 자랑하는 김 전 원장은 요즘도 부인과 함께 경주 곳곳을 찾아다니며 관광객들과 신라문화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김 전 원장은 “교통수단이 열악하고 도로가 미비했던 시절 수십리 길을 걸어서 첩첩산중에 숨어 있는 문화재를 찾아갔다”며 “당시 젊은 축이었던 사람들이 현재 향토 원로로 신라문화동인회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김 전 원장은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12년간 신라문화동인회 회장을 맡았다.

신라문화동인회는 지난해 창립 50주년이라는 뜻깊은 해를 맞았다. 동인회는 매월 1차례의 현장답사와 문화재 해설의 밤을 열어왔는데, 지난 50년간 단 한 차례도 거른 일이 없었다. 김 전 원장은 “또 매년 10월 10일 계림숲 내물왕릉 앞에서 ‘새벌향연의 밤’을 열어왔는데, 이는 이름을 남기지 않은 선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제전”이라고 소개했다.

또 동인지 ‘천고(穿古)’를 발간해 연구성과를 인쇄물로 남겼다. 그리고 김 전 원장은 신라역사를 지키기 위해 경주박물관학교를 지원하고 향토어린이학교를 운영해 왔다.

“동인회는 지금도 80여명의 회원이 있는데, 모두 신라문화에 대한 지식이 막힘이 없을 정도”라며 “유수한 국내 고고학자, 사학자치고 이 동인회 문화강좌 강단에 서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강좌의 질이 높다”고 밝혔다.

김 전 원장이 혼신의 정성을 쏟은 신라문화동인회는 많은 유적들을 발견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김 전 원장은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서 소규모 석굴암, 동남산 청동굴에서 디딜방아터, 암곡동에서 도요지, 승복사지에서 12지석 등을 발견했으며, 그 외에도 여기저기서 많은 유물을 발견해 학계에 보고하는 실적을 거두기도 했다”고 말했다.

“1960년대 남산 답사를 갔다 아무런 성과 없이 하산하다 우연하게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계곡에서 마애석불을 발견했을 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며 “그때의 환희는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라고 김 전 원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도 남산을 오를 때는 혹시라도 발견되지 않은 문화유적이 있을까 온 신경이 집중되고 긴장된다”는 김 전 원장은 “신라 문화재를 찾고 지키는 것은 아마도 내겐 운명인가 보다”고 말했다.

김 전 원장은 신라문화동인회뿐 아니라 98∼2000년 경주 향토문화연구소장, 2000년부터 2004년까지 4년간 경주 문화원장을 맡는 등 지역 문화발전에 한 획을 그었다. 경주문예회관 건립에도 앞장섰다. 김 전 원장은 “세계적 문화관광도시인 경주에 문예회관이 없는 것은 시민의 수치”라며 2004년 경주지역 14개 문화단체 대표들과 함께 시민 10만명의 서명을 모아 문화관광부에 회관 건립을 건의하기도 했다.

고 고청 윤경렬 선생과의 인연은 빼놓을 수 없다. 윤경렬 선생 추모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 전 원장이 고청을 처음 만난 것은 1954년. 고청이 사망한 99년까지 45년간 만남을 이어온 것이다. “고청이 박물관학교를 개교했을 때 대학생 신분으로 고청을 도왔고 신라문화동인회를 만들 때는 창립회원으로서, 그 뒤 고청을 이어 신라문화동인회 회장으로서 오랫동안 모임을 이끌었다”고 고청과의 인연을 밝혔다.

2004년 경주시사 편찬위원회 집필위원장으로 활동한 뒤 이렇다 할 공식 직함을 갖고 있지 않은 김 전 원장은 “경주는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우리 민족과 함께 숨쉬었던 2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 역사의 도시”라며 “내 몸이 늙고 병드는 것은 아쉽지 않지만 경주와의 인연을 잇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흘러가는 시간이 원망스럽다”고 각별한 경주 사랑을 나타냈다. 경주=장영태 기자 3678jy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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