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지킴이

문화재위원 이형구 선문대 교수

바보처럼1 2007. 7. 24. 11:38
[이사람의 삶]문화재위원 이형구 선문대 교수
30년 동안 최장수 문화재 전문위원 지내
"사라질 뻔한 백제 유적 지켜낸 게 큰 보람"
“감개무량합니다.”

문화재청이 최근 새로 위촉한 120명의 문화재위원 중에는 최장수 문화재전문위원을 지낸 이형구(63·사진) 선문대 역사학과 교수가 포함돼 있다. 지난 3월 전문위원 30년이란 이색 장수기록을 세우면서 “제도권은 제도권의 역할이 있고, 나같이 바깥에 있는 사람의 역할은 따로 있다”며 자못 의연한 모습을 보인 이 교수였지만 내심 서운함을 느껴온 것도 사실. 무려 30년 만에 사적분과 문화재위원으로 승격된 만큼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전문위원은 특별한 권한이 없이 단순 자문 역할에 그치는 반면 문화재위원은 문화재 보존·관리와 활용에 관한 심의권을 갖는다. 위상도 위상이지만, 실질적인 차이가 작지 않다. 그는 축하 전화에 대해 “그동안 내가 했던 일이 조금이나마 인정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으며 ‘매우 솔직하게’ 기뻐했다.

이 교수가 문화재전문위원에 위촉된 때는 1977년. 당시 33세의 젊은 학자였다. 시작은 평탄했으나, 풍납토성을 둘러싸고 주민과의 갈등이 빚어지면서 그는 코너로 내몰렸다. 잠실벌의 백제 유적들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지 못한 시절이어서, 그의 ‘백제 왕성’ 주장이 학계에서조차 “터무니없다”며 배척받기도 했다. 학계 안팎에 두루 뮨제를 일으키면서 그는 문화재위원으로 앉히기엔 껄끄러운 인사가 됐다. 최장수 전문위원을 지내야 했던 속사정이다. 풍납토성은 이형구라는 이름 석 자를 알렸지만, 동시에 그의 발목도 잡은 것이다.

풍납토성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44년 전 대학은사인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따라 역사유적탐방에 나서면서부터. 당초 그 웅장한 모습에 매료돼 공부를 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80년 이후 ‘행동파’로 나서게 됐다. 대만 유학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은 81년, 백제왕릉으로 추정되는 피라미드형 적석총이 반으로 잘려나간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고 4년간 보존 운동을 펼쳐 백제왕성을 지켜냈다. 올림픽대교도 그의 고집 앞에 풍납토성을 비켜가면서 세워졌다. 아쉽게, 지켜내지 못한 것도 있었다.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 유적이 있는데 석촌동과 방이동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건의해 지켜냈습니다. 그러나 가락동은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전날까지만 해도 온전한 걸 분명히 목격했는데 다음날 가보니 완전히 갈아엎었더라고요. 보존에 들어가면 개발이 어려워질까봐 걱정한 개발업자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석촌에서 가락, 방이로 이어지는 백제왕성의 변화와 특성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허리가 잘려나간 느낌이었죠.”

97년 1월1일, 이 교수는 선문대 학생들과 풍납토성 학술발굴작업을 벌이던 중 근처 아파트 공사장에 몰래 들어갔다가 초기 백제토기들을 발견했다. 백제왕성 터임을 입증하는 유적이었다. 이 교수는 국립문화재 연구소에 이를 보고했고 공사는 당장 중단됐다. 영원히 땅 속에 묻힐 뻔했던 백제의 숨은 역사를 지켜낸, 그에게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2004년 열린 풍납토성 발굴 설명회.

이렇게 문화재 보존에 몰두하다가 인근 주민들에게 미움을 샀다. 땅값이 오르지 않아 이사를 가기도 어려워진 탓이다. 4시간씩 감금되고 폭행도 당해 한 달간 병원 신세를 졌다.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했다. 나중에 폭행 당한 것을 알아차리고도 부인은 돌덩이 하나, 구덩이 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남편의 성격을 알기에 “당신이 좋아하는 걸 해야지”라는 말밖에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주민들에게 무조건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불가피하기에 정부에 건의도 했습니다. 풍납토성 발굴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신도시 입주권 같은 혜택을 주자고 말이죠.”

그가 제안했다는 ‘신도시 입주 우선권’은 다소 황당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간 겪은 심적 고통이 짙게 깔려 있는 목소리여서 웃고 넘기기도 어렵다.

“고고학은 발굴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그 발굴로 이뤄낸 유적을 후학에 고이 넘길 수 있도록 보존하는 것까지가 우리 역할입니다. 지금 알아내지 못한 사실들, 미래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2000년 전의 역사를 파헤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문화재 보존을 고집스럽게 외치다 본의아니게 ‘트러블메이커’로 찍혔던 이 교수가 고려해야 할 부분은 이제 과거보다 많아질 것이다. 새롭게 부여받은 ‘지위’가 지금까지의 ‘투쟁’ 노선에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30년 몸에 밴 습관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습니까. 할 말이 있을 땐 하고, 조화가 필요할 땐 조화를 이뤄나가야 되겠죠. 그래도 역시 개발보다는 유적 보존이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정진수 기자

yamyam198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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