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지킴이

앞서가는 행복한 음악가 - 원장현 명인

바보처럼1 2007. 7. 25. 08:46

[국악인]앞서가는 행복한 음악가 - 원장현 명인

대금의 명인 원장현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안국동의 멋진 3층집에서 많은 사람들이 칭찬해 마지않는 아들딸과 음악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아내와 걱정 없이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 완철은 이미 최고 수준의 대금 연주자로 국립국악원 연주단원이고 딸 나경 역시 서울 음대 졸업반이면서 전국 국악경연대회를 석권할 만큼 뛰어난 해금 실력을 과시하고 있다. 온 가족이 음악으로 자기 세계를 구축할 만큼 실력 있는 개개인이어서 국악인이면 모두 부러워할 정도다. 음악만 해온 원장현이지만 자동차도 외제 볼보를 타고 로터리클럽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지나는 사람들이 집에 들르면 차 한 잔이라도 따뜻하게 대접할 만큼 여유 있게 산다.

1982년 서울에 올라와 83년 국립국악원에 입단한 원장현은 처음 아쟁으로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단원이 되었다. 그 후 거문고로 바꾸어 단원생활을 하다가 나중에야 자기 전공인 대금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애초부터 대금을 전공했지만 국립국악원에서 대금 연주자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그가 왼손잡이여서 대금을 왼쪽으로 잡고 불기 때문이었다. 고수는 왼손잡이라도 상관없이 무대에 세우면서 대금만은 오랫동안 무대에 세우지 않았던 과거 편견 때문에 원장현은 아쟁과 거문고를 상당 수준으로 연주할 수 있는 음악가가 되었다. 1950년 전남 담양 출생인 그는 아버지(光俊 : 대금) 삼촌(光浩 : 거문고의 인간문화재)이 모두 음악가인 음악 가문 출신이어서 중학생 때부터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김용기에게 처음 대금을 배웠고 김동식에게 대금산조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제일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은 한일섭이다. 민속악의 천재라 불리던 한일섭은 그분 생의 마지막 무렵에 원장현을 만나 본인이 생각하는 멋진 대금산조 가락을 구음으로 가르쳐 주었다. 한일섭은 대금 연주자가 아니었지만 한주환과 오랫동안 활동한 영향도 있고 하여 정말 멋진 대금산조 가락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전수받은 대금 가락을 실제 악기에 올려 연주한 것은 원장현이다. 그런데 85년 국립국악원의 무형문화재 제66회 공연 때 원장현은 바로 그 대금산조를 연주하게 되었는데 그 대금산조의 이전 연주자가 없기 때문에 ‘원장현류 대금산조’라고 발표했다. 원장현류 대금산조가 세상에 나오게 된 계기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남들은 누구의 뒤에 자기를 세우려 난리를 치는 시대에 30대의 젊은 연주자가 떳떳하게 자기류의 작품이라고 발표했으니 그 생각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멋진 대금산조 작품의 창시자가 되었고 그 음악을 녹음한 음반은 엄청난 양이 팔려 나갔다. 뿐만 아니다. 93년 <원장현의 음악세계>와 98년 <날개>를 음반으로 냈는데 그 음반 역시 수억 돈을 벌 수 있을 만큼 많이 팔렸다. 2001년에 낸 <항아의 노래>도 계속 잘 팔리고 있는 음반이다. 이런 음반들의 음악은 모두 원장현이 직접 작곡하여 녹음한 것들이다. 악보로 그리는 작곡이 아니라 옛날 명인들처럼 그냥 본인의 구상대로 악기로 직접 연주하는 그런 작곡 방법이다. 딸 나경이 건반악기를 하기 때문에 함께 작업하면서 새 음악을 구상하기도 한다. 그런 민속 감성의 음악들을 음반으로 내놓아 큰돈을 번 것이 원장현이다. 한때 인사동 거리에서 판매한 적이 있는데 매일 200만 원 정도의 음반이 팔렸었다고 한다.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았을 때도 음반 매장에서 음반을 가지러 온 직원을 볼 수 있었다.

원장현은 남을 앞서가는 생각을 하고 그런 것 여러 가지를 실천했기 때문에 지금 잘 사는 국악인이 되었다고 본다. 음반도 그런 예이지만 공연도 특별한 공연을 많이 했다. 93년에 시작한 ‘원장현과 아시아음악’이라는 공연은 중국의 음악가를 초청하여 공연하고 또 다음번에는 인도의 음악가를 초청하여 공연하는 식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 음악가를 초청하여 그 나라 음악과 한국음악을 비교 감상할 수 있도록 음악회를 하는 것이다. 이런 음악회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원장현의 음악에 매료된 재일 교포 도쿠마루(德山 洪允茂) 씨가 적극 후원했기 때문인데 이후에는 원장현 스스로 이 음악회를 계속할 수 있을 만큼 힘이 생겨서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후원자도 생기고 매표도 잘 되고 하니까 가능한 일이다. 원장현 가족은 모두 음악을 한다. 부인 조경주는 서울 음대에서 해금을 전공했으면서 고전무용도 솔로를 할 정도로 잘 춘다. 아들은 대금을 전공했고 딸은 해금을 전공했는데 원장현의 누이동생 원경애도 가야금을 전공했다. 그래서 가족들이 함께 호주에 가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일본에 가서 공연을 하기도 한다. 원경애 씨가 일본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본 공연은 더 자주 하게 된다. 도쿄(2000년)에서도 했고 오사카(2005년)에서도 했다. 금년 가을에도 일본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

원장현은 30대에 대금산조로 일가를 이루었기 때문에 제자도 많이 길러내었다. 부인과 함께 금현국악원을 88년에 설립하여 일반인 전공자 할것없이 제자를 길러내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한다. 그가 펴낸 대금산조의 악보가 3000부 이상 팔렸으니 그 숫자만 봐도 그의 음악을 하는 대금 인구가 많을 것이라는 것이 짐작된다. 대학교수가 된 제자들만 따지더라도 서울대의 임재원, 수원대의 임진옥, 영남대의 안성우, 전북대의 이화동 등 여러 명이고 각 악단에서 활동하는 전문인이 수두룩하다. 이런 그의 활동이 널리 알려져 그의 고향 담양에서는 그의 대금 부는 실물 형상을 조각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고 금년 제4회째인 담양전국대나무악기경연대회를 만들어 하게도 했다. 대회의 일반부와 학생부 우승자에게는 원장현의 호를 딴 동려상(東呂賞)을 준다. 그가 태어난 고향이 그를 훨씬 높여주고 그의 예술을 많이 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 봐도 원장현은 행복한 사람이다. 국악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국악만 하고 사는데 남들보다 잘 살고 남들에게 덕을 입히며 살고 있다. 지금 다섯 번째 음반을 구상하고 있다는데 좋은 음반 만들기 바라고 가을에 있을 가족들의 일본 공연도 잘하기 바란다.

글 최종민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삶과꿈 4월호

기사일자 : 2007-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