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뜨락

국문학자 정민 씨의 <한시미학산책>

바보처럼1 2007. 8. 5. 09:16
 
절제­함축「한시의세계」로초대/국문학자정민씨「한시미학산책」
◎고려이후 3백여수 알기쉽게 풀이/우리시대의 보편적 정서로 재창조

나뭇잎 지는 소리가 들리고 시냇물이 흐르는가 하면 산사의 중문 위로 달빛이 내린다. 이별한 님을 그리는 정한이 행간의 여백 사이로 번지고 세상 사는 이치의 깨달음이 송림 사이로 흐른다. 비 맞으며 꽃은 피 고 바람 불어 꽃이 진다. 절제와 여백과 함축의 미학 속에 우리 정서 의 원형질이 녹아 있는 한시의 세계는 이처럼 단아하고 풍요롭다.

한시는 그러나 딱딱한 고문체 번역에다 게으른 선비들의 하릴없는 취향 정도로 백안시 된 채 서구에서 마구잡이로 들여온 문예이론에만 목을 걸 고 생경한 관념의 바다에서 헤매는 게 우리 시단의 현실이라는 지적도 만만찮다. 최근 솔출판사에서 간행된 「한시 미학 산책」은 어렵고 진부 하게만 느껴지던 한시를 매개로 전통 시학을 재발견하고 우리 정서의 원 형질을 찾으려는 소장 국문학자 정민씨(36.한양대 교수)의 역작이다. 시쓰기의 괴로움과 다양한 형식실험,이른 바 시마에 들씌운 예술혼의 비극 등 소위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기말의 오늘날의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시학」에 2년여동안 뜨거운 호응속에 연재된 글을 모두 24꼭지로 정리한 이 책은 한시의 언어미학,그림과 시의 관계,언어로 다할 수 없어 형상을 세워 뜻을 전달하는 입상진의론,당시와 송시,한 시의 정운미와 정경론,한 글자만 더하거나 빼도 와르르 무너지는 일자사 이야기 등으로 다채롭다. 아울러 입만 열면 시가 되어 나오는 시마 이야기,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는 시인과 궁핍의 숙명성,참신한 형식 실험의 세계를 다룬 잡체시의 실험정신,바라봄의 시학 관물론,깨달음의 바다를 이룬 선시,사랑의 슬픔이 진득하게 담긴 정시의 세계 등이 담겨 있다. 그러나 한자가 섞인 소제목만 열거해도 미리 숨이 막히는 현대 인들에게 이 책은 시인의 감수성과 미려한 산문으로 3백여 수의 한시를 번역하고 아름답게 해설을 붙여가며 오늘날의 혼란스런 정서를 맑게 추 스려주는 데 그 매력이 있다.

『어젯밤 송당에 비 내려 / 베갯머리 서편에선 시냇물 소리 /새벽녘 뜨락의 나무를 보니 /자던 새 둥지를 뜨지 않았네 (작야송당우 / 계성일침서 / 평명간정수 / 숙조미리서 )』

고려때 시인 고조기가 지은 「산장우야」를 두고 정교수는 『산이 있고,그 속에 집이 있다. 사방은 고요하고,정신은 해맑다. 이른 새 벽 들창을 열어 가만히 밖을 내다보는 시인의 시선 속에 떠돌고 있는 법열의 생취를 보라』고 부연한다. 한시의 언어미학은 「행간에 감춰진 울림,언어의 발자취를 벗어나 허공에 매달려 있는 떨림이 중요하다」는 전언이다. 그래서 정씨는 한시의 언어미학을 「허공속으로 난 길」이라 하였다.

정교수는 지나치게 실학중심의 개혁적 메시지만을 뽑아 내려던 80년대의 연구태도나 예전의 언어로만 직역해냄으로써 대중과 유리되는 고답적 자세에서 벗어나 삶의 체취 속에 깃든 한시의 미학을 우리시대 의 보편적인 정서와 호환될 수 있도록 재창조해내는데 진력해 왔다. 그 는 『몇백년전의 그들을 지용이나 영랑,미당과 목월로 연결해주는 원형질 이야말로 이 강산,이 흙을 밟고 살아온 사람들의 가슴속에 스민 정서일 진대 바슐라르 따위의 서양이론으로 우리 시를 분석해봤자 수술은 끝날지 모르나 사람은 죽고 마는 우를 범하는 꼴』이라고 말한다.

정교수의 주장은 주역의 「궁하면 변하고,변하면 통한다. 통하면 오래 간다」는 통변의 정신을 들어 일방적인 전통 추수가 아닌,지금과 옛것 사이에 숨을 통하게 하여 기형적인 우리의 시정신을 바로세우자는 뜻이다. 5백 여쪽에 걸쳐 현대적인 감각으로 담백하게 한시를 풀어놓은 이 책 속에 정씨의 주장은 한시의 여백처럼 촘촘히 스며 들었다.〈조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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