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달팽이
김신용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나가 버린다
치워라, 그늘!
―신작시집 ‘도장골 시편’(천년의시작 펴냄)에서 ▲1945년 부산 출생, 1988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록’ ‘환상통’ 등. ▲천상병문학상, 노작문학상 수상. |
2007.04.21 (토) 04: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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