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뜨락

도장골 시편-민달팽이............김신용

바보처럼1 2007. 8. 5. 14:12
 
[詩의 뜨락]도장골 시편-민달팽이
도장골 시편

- 민달팽이

김신용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나가 버린다

치워라, 그늘!

―신작시집 ‘도장골 시편’(천년의시작 펴냄)에서

▲1945년 부산 출생, 1988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록’ ‘환상통’ 등.

▲천상병문학상, 노작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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