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지킴이

(49)'은율탈춤' 보유자 김춘신씨

바보처럼1 2007. 8. 8. 21:00
▶한국의 名人◀ (49)`은율탈춤' 보유자 김춘신씨
▶한국의 名人◀ (49)`은율탈춤' 보유자 김춘신씨
(인천=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61호 `은율탈춤' 기능 보유자 김춘신(86.여)씨가 탈춤과 함께해온 한평생을 회상하고 있다.

  mina113@yna.co.kr
(끝)

(인천=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춤을 추고 있으면 몇 시간이 지나도 힘든 줄을 몰랐어요. 그저 날아가는 기분에 빠져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안 났지. 그 긴 세월을 오로지 춤 생각만 하면서 춤 하나에만 의지해 살아왔어요"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61호 `은율탈춤' 기능 보유자 김춘신(86.여)씨가 힘겹게 첫마디를 뗐다. 탈춤과 함께해 온 긴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작고 여려보이는 체구였지만, 느릿느릿 울려나오는 한마디 한마디에는 지난 시간을 온몸으로 관통해온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옹골진 힘이 배어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이 느티나무 녹음 속에서 빛나던 6월 중순 어느날 오후. 인천 남구 수봉공원 입구에 있는 은율탈춤보존회 전수관 사무실에서 탈춤의상인 푸른 두루마기를 걸친 김씨를 만났다. 김씨가 아낀는 제자이자 은율탈춤보존회 부회장인 차부회(48)씨도 자리를 함께했다.

   춤과 살아온 삶을 몸으로 증명하듯 8년전부터 심해진 무릎 관절염 때문에 김씨는 현재 서 있기가 어려운 상태였고 기력이 쇠해 말을 이어나가는 것도 힘에 부쳐보였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김씨는 "너무 오래 돼 가물가물하다"며 힘겹게 80여년전의 고향 마을과 유년시절의 기억을 하나둘 더듬어갔다.

   김씨의 고향은 지금은 북한땅인 황해도 은율군 은율읍. 2만여 가구가 사는 소박한 농촌 마을이었지만 앞으로는 은율평야를 끼고 있고 뒤로는 구월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아늑하고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구월산이 20리 밖에 떨어지지 않아 임산물이 풍부했고 농사가 거의 매년 풍년이어서 사람들 살림살이가 여유로웠지. 그래서인지 마을사람들 모두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예인(藝人)들이었어요. 낮에 농사일이 끝나면 저녁때는 매일같이 마을 한가운데 모여 탈춤과 풍물.농악판을 벌이곤 했어"
이런 마을 분위기 탓에 김씨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탈춤을 보고 익히며 자랐다. 집안 사정이 여유로운 편이어서 여자이면서도 중학교까지 다녔지만 학교를 다니면서도 마음은 늘 탈춤과 놀이판에 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끼'랄까, 무작정 춤에 이끌리는 특별한 기운을 타고난 것 같아요. 춤패와 어울려 놀다보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놀다가 집에 늦게 들어가기 일쑤였지. 수없이 야단을 맞았지만 그렇다고 막을 수가 없었지"
예(藝)와 풍류를 사랑하는 고장에서 자랐지만 양반.상놈의 구분이 아직 남아있던 시대여서 여자의 몸으로 `광대짓'을 내놓고 하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모님께 들킬까 가슴을 졸여야했지만 김씨는 굴하지 않고 당시 탈춤패의 중심 역할을 했던 고(故) 장용수(1903∼1997) 선생과 고 장교헌(?∼1977) 선생을 줄기차게 쫓아다녔다.

   그렇게 청춘을 탈춤패와 보내며 행복해 하던 가운데 한국전쟁(6.25)이 터졌고 고향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김씨 역시 전쟁 중에 가족과 헤어져 친구들 몇명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온 뒤 인천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 10여년간 홀몸으로 먹고살기에 바빠 고향과 탈춤에 대해 서서히 잊어가고 있던 중 어느날 김씨는 탈춤패의 장영수 선생과 해후하게 된다. 장선생이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남쪽에 내려온 예전의 탈춤패를 모으기 위해 애쓰던 중 장교현 선생과 김옹을 찾아내게 된 것이다. 그때가 1967년이었다. 이때부터 이들 3명은 의기투합해 `은율탈춤보존회'를 결성, 탈춤 복원에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1960년대 대학가를 휩쓸던 문화운동 붐에 힘입어 복원이 빨랐던 봉산탈춤이 1967년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데 반해 은율탈춤은 복원이 늦게 시작되는 바람에 문화재 지정도 늦어졌다.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던 10여년간 김씨는 이를 악물고 탈춤 복원에 모든 걸 바쳤다. 얼마 안 되지만 혼자 살며 그동안 모았던 돈을 탈춤에 모두 쏟아부었고 돈이 떨어져 소품.의상 마련이 어려워지자 틈틈이 삯바느질 부업까지 해가며 비용을 조달, 전국 각지로 공연을 다녔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웠던 시절에도 김옹은 탈춤의 신명에 취해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 한번 하지 않고 혼자서 꿋꿋이 버텨냈다.

   그 피땀의 결실로 은율탈춤은 점차 알려지기 시작해 1978년 드디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제 19회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 민속극 부문에서 문화공보부 장관상까지 받기도 했다. 서울대 국문과 이두현 박사에 의해 은율탈춤이 대본으로 정리.완성된 것도 바로 그 해이다.

   이후 은율탈춤은 더욱 널리 뻗어나갔다. 84년 일본 오사카 국제무역박람회에 초청받아 탈과 의상을 전시하고 탈춤을 시연한 데 이어 아시아소사이어티 초청 미국순회공연을 비롯 프랑스.러시아.스페인.그리스 등 해외 수십개국에서 공연이 이어졌다.

   보존회 회원은 현재 230여명으로 불었고 고정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만 60여명, 청소년 회원도 30명이나 된다. 매년 2차례 정기공연 때는 전수관 앞 노천극장이 수백명 관객으로 꽉꽉 들어찬다.

   "은율탈춤은 봉산.강령탈춤과 비슷한 점이 많지만 풍자가 가장 날카롭고 해학미가 남다릅니다. 중독성이 매우 강해서 공연을 한번 맛본 사람들은 계속해서 찾아오게 되지요."
은율탈춤보존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차부회씨가 김씨를 대신해 탈춤에 대해 설명했다.

   은율탈춤의 유래는 300여년전으로 올라간다. 조선 말기 각 지역에서 민란이 빈번하자 난리를 피해 은율지방에 찾아든 사람들이 신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얼굴에 탈을 쓰고 놀이를 한 것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설이라고 한다.

   놀이마당은 다른 탈춤과 비슷하게 6과장(마당)으로 이뤄지며 각 장은 각각 사자춤, 상좌춤, 팔목중춤, 양반춤, 노승춤, 미얄할미 영감춤 등으로 시작된다. 모두 24개 배역과 북.장구.징.꽹과리.피리 등 5인조 악사로 구성되며 1명의 배우가 2∼3개 배역을 번갈아가며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인인 `말뚝이'가 등장해 우매한 양반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것은 다른 탈춤들과 비슷하지만 뒷부분에서 원숭이가 등장해 양반의 첩인 `새맥시'와 수작, 아이를 낳는 것과 파계승인 노승이 등장해 노래와 염불, 대사를 소리내서 하는 점이 양반과 불교에 대한 풍자에 있어 더욱 신랄하다. 또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탈춤 가운데 원형에 가장 가깝게 복원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연로한 김씨를 대신해 은율탈춤보존회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차씨는 "회장님이 없었으면 현재의 은율탈춤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김씨는 "탈춤 복원을 함께 시작한 두 장선생님과 여기 차 부회장이 없었다면 여자의 몸으로 혼자 지금까지 보존회를 꾸려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연방 몸을 낮췄다.

   "은율탈춤과 한평생을 보내온 지금 더이상 여한은 없지만 단 하나 소원은 은율탈춤이 대대손손 영원히 이어지는 거예요. 영원히, 영원히.."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진 김씨는 기력이 떨어져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기자의 손을 꼭 잡았다. 간절한 소망을 담은 눈빛만이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고 여전히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mina113@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7/06/26 06: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