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名人◀ (50)하회탈 제작자 김동표씨(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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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한길' 하회탈 장인 김동표씨
(안동=연합뉴스) 김용민 기자 =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하회마을 부근에 자리잡은 '하회동 탈 박물관' 관장인 구하(九河) 김동표(金東表.55)씨는 30년 동안 하회탈을 만들어 왔다. yongmin@yna.co.kr (끝) |
연합뉴스 전국부는 1년 가까이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판소리, 도자기 , 탈춤, 유기 제작, 줄타기 등 각 분야의 전통문화 계승자들을 발굴.소개함으로써 우리나라 전통문화 발전에 미흡하나마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명인' 시리즈를 열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들과 취재에 협조해 주신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안동=연합뉴스) 김용민 기자 = "탈들이 각자 독특한 얼굴 표정을 짓고 있죠. 우리 조상들의 옛 모습이 저랬을 것같아요"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하회마을 부근에 자리잡은 '하회동 탈 박물관'의 책임자인 구하(九河) 김동표(金東表.55)씨는 이렇게 말했다.
전국 여러 곳에 수많은 전통탈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하회탈 만큼 인간의 희로애락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는 탈은 없다.
현존하는 9개의 하회탈 가운데 양반탈과 선비탈, 백정탈, 중탈 등을 살펴보자.
이들 탈의 경우 턱 부분과 본체 부분이 분리돼 있어 탈을 쓴 사람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으면 탈의 입도 크게 벌어져 박장대소하는 모습이 되고 고개를 숙이면 탈 또한 화가 난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문 모습이 된다. 탈을 쓴 사람의 심리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수많은 탈 가운데 하회탈이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이유도 이런 하회탈의 특징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처럼 사람의 표정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하회탈을 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각종 공연무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된데는 평생을 하회탈과 함께해온 김씨도 한 몫을 했다.
물론 김씨는 "신기하게도 아홉개 탈 모두 별신굿 놀이에서 맡은 역할과 이름에 꼭 들어맞는 생김새를 지녔다"라는 말로 자신의 공을 애써 감추려 했다.
다른 수공예품과 마찬가지로 탈 또한 `기다림과 정성'의 합작품이라고 한다.
수십년 된 오리나무를 베어 10cm 두께로 잘라 놓은 뒤 바람이 잘 통하는 응달에서 2년을 말려야 한다.
그 뒤 잘 마른 나무에 연필로 얼굴 윤곽을 그리고 불필요한 부분은 깎아내면서 본격적인 탈 만들기가 시작된다.
탈의 앞면이 훼손될 수 있어 뒷면부터 먼저 파내는데 아무리 뒷면이지만 얼굴에 써야 하는 만큼 놀이꾼의 얼굴과 닿는 부분이 없도록 세심하게 작업해야 한다.
눈과 코는 물론 콧구멍과 주름까지 완벽하게 조각한 뒤에는 한지를 찢어 탈 앞면에 고르게 바르고 물감과 황토가루 등으로 색을 입히는 작업이 뒤따른다.
색을 칠하고 하루동안 말리기를 두어 차례 반복한 뒤 마지막 채색과 함께 옻칠로 마감한다.
턱이 분리돼 있는 양반, 선비, 백정, 중의 탈은 따로 턱을 만든 다음에 탈과 턱 부분을 실로 꿰어 연결한다.
김씨가 이렇듯 결코 작지 않은 정성이 필요한 하회탈 만들기에 투신한 지도 어언 30년이 흘렀다.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쳐간 탈만 해도 5천개가 넘는다.
우리나라 각종 박물관은 물론 미국 백악관 박물관 등 세계 곳곳에서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하회탈의 상당수가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씨가 목공예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은 약관의 나이에 접어든 지난 1972년부터다.
갓 스무 살 먹은 시골 청년은 목공예가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가 한 목공예 학원에서 6개월 동안 열심히 나무를 깎았다.
3년 동안의 군 복무 생활을 마친 뒤에는 목공예 대가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1978년에는 서양화가 윤석원씨로부터 데생을 배우기도 했다.
그 뒤 서울에서 개인 공방을 운영하던 김씨는 1980년 고향으로 내려와 하회마을 부근에서 '부용 탈방'이라는 작업실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탈 제작에 나서게 된다.
1982년부터 2년 연속 경북공예품경진대회에서 은상과 장려상을 타는 등 떠오르는 목공예 신예로 명성을 날렸고 1983년부터는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로 등록해 직접 각시 역할을 맡으면서 하회탈놀이 부흥에도 앞장섰다.
이 밖에 1996년에는 사비를 털어 하회동 탈 박물관을 설립하는가 하면 이듬해 제1회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에서는 '세계 탈 전시회'를 여는 등 탈 문화 보급과 세계화에도 기여했다.
그의 진가가 최고조에 달한 시점은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안동을 찾았을 때였다.
여왕에게 줄 선물이 하회탈로 정해지면서 그는 안동시의 의뢰를 받아 한 달 가까이 혼신의 힘을 다해 선물용 하회탈을 만들었다.
그는 "영국 왕실에 한국의 상징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이만저만 부담스럽지 않았다"면서 당시를 떠올렸다.
지금도 이따금씩 탈 제작 주문을 받으면 작업실 문을 걸어 잠그고 한 달이 넘게 나무와 씨름을 한다.
작업실 문을 잠그는 것은 하회탈이 유래된 허도령의 전설 그대로다.
하회탈을 만들던 허도령을 사모했던 어느 낭자가 허도령의 당부를 어기고 탈 만드는 장면을 엿보다 결국 허도령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전설이 하회마을에 전해오고 있다.
김씨는 그러나 소중한 우리의 탈 유산을 애정을 갖고 바라봐 줄 것을 당부한다.
"별 표정이 없어 보이는 탈도 애정과 관심을 갖고 바라보면 우리 곁에 살아 숨쉬는 이웃처럼 느껴질 겁니다"
yongmin@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7/07/03 06: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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