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名人◀ (10)전통도자기 거장 김정옥씨
(문경=연합뉴스) 손대성 기자 = '들들들들...'발물레 소리에 맞춰 그릇을 빚어내는 한 장인의 손길이 분주하다.
2006년 가을 어느 날 오후, 경북 문경시 문경새재 아래 진안리에 자리잡은 영남요(嶺南窯)에서 새하얀 한복을 입고 도자기를 만들던 한 장인이 반갑게 손님을 맞았다.
영남요의 주인인 백산(白山) 김정옥(金正玉.66)씨다.
국내에 도자기를 만드는 도예인들은 샐 수 없이 많지만 일가를 이뤘다고 평가할 만한 명인은 그리 많지 않다.
국가 무형문화재 105호인 사기장으로 지정된 도예인은 김정옥씨가 유일하다. 국가로부터 도자기를 가장 잘 만든다고 인증을 받은 셈이다.
그의 작업실에 들어서자 초벌구이를 앞둔 갖가지 그릇들과 그릇을 만드는 재료인 흙이 손님들을 반긴다.
김씨는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짙은 눈썹을 치켜뜬 채 물레를 힘차게 발로차며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마치 공무원이나 회사원인 처럼 오전 8시30분이면 어김없이 작업실로 출근해 오후 6시까지 꼬박 작품활동에 몰두한다.
지금이야 국내 최고의 도예가로 인정을 받고 있는 김씨이지만 한때는 공무원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누구나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학비를 내지 못해 중학교 3학년을 중퇴해야 했을 때였다.
한 때 선친인 김교수씨가 부자 소리도 들었지만 가세가 기울면서 김 씨는 학교를 중퇴해야만 했으며 어쩔 수 없이 6대조 때부터 가업으로 이어져온 도자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 밑에서 흙을 고르고, 땔감을 나르고, 그릇을 만들면서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현재는 찻사발, 찻주전자 등 '작품'을 주로 만들지만 당시에는 요강이나 화분 등 실생활에 필요한 '사기'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선친인 김교수씨의 명성을 듣고 때때로 외지에서 고객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값싼 플라스틱이나 양은 그릇이 나오면서 1년에 한 두 번 가마에 불을 땔 정도로 그의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처럼 무명의 도예공이었던 김씨가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긴 1980년대였다.
김씨는 1983년 경북공예품경진대회에서 입선한 뒤 1987년 전승공예대전 특별상을 받는 등 각종 대회를 휩쓸었다.
때마침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일본과의 교류도 활발해지면서 그의 솜씨를 알아본 일본인들이 늘어나는 등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큰 기교 없이 만들어 낸 그의 작품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국내 정상급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
1991년 정호다완을 재현해 도예부문 초대 명장이 된 그는 1996년 마침내 국내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 사기장으로 지정됐다.1999년에는 문경대학 초대 명예교수로 임용된데 이어 2000년에는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현재는 일본은 물론 미국 등 외국에서도 그의 진가가 알려져 미국 스미스 소니언 박물관을 비롯해 캐나다 왕립박물관, 독일 베를린 동아시아 박물관 등에 그의 작품이 전시돼 한국의 미를 세계에 알리고 있다.
매년 열리는 문경 전통찻사발축제 추진위원장까지 맡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의 대표작은 청화백자와 정호다완이다. 집안 대대로 이어지는 청화백자에서는 소박하면서도 고고한 멋을 느낄 수 있고 정호다완에서는 정갈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에게는 늘 `국내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김씨는 전기물레 대신 발물레로, 가스가마 대신 전통 장작가마인 망댕이가마로 그릇을 빚는 등 200여년 전 조상들이 사용한 전통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가스가마나 전통가마나 언뜻 보면 작품 차이는 별로 없을 지 몰라요.하지만 가스나 석유 때문에 지구 대기가 나빠지는 반면, 나무를 때면 독성이 없습니다. 독성 없는 불로 그릇을 구워야 되지요. 전통가마로 구워낸 그릇과 가스가마로 구워낸 그릇 중 가스가마 그릇에 꽂아 둔 꽃이 먼저 시든다란 말도 있잖습니까."
밝게 빛나는 그의 눈빛에는 7대째 이어온 장인의 자부심과 고집이 담겨 있다.
요즈음도 그는 그릇을 빚고, 문양을 새기고, 그림을 그리고, 구워내는 등 도자기를 만드는 모든 과정을 직접한다.
두 달에 한 번 가마에 불을 때면 150~200개 정도의 그릇을 넣는다고 한다. 물론 하나도 건지지 못한 때도 있으며. 보통 50% 정도를 건진다고 김씨는 설명했다.
장남이 아닌 그가 가업을 잇게 된 것을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김씨는 "한 집안에 기술자는 한 명만 있으면 된다"면서 "작고한 두 형이 이 일을 하지 않아 제가 가업을 잇게 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현재 7년간 군생활을 접고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며 나선 아들 경식씨뿐 아니라 큰형인 천만씨의 아들 영식씨, 둘째형 복만씨의 아들 선식씨 등 아들과 조카들이 모두 같은 길을 걷고 있어 김씨를 흐뭇하게 하고 있다.
"전시해 놓은 모든 작품을 아끼지만 아직 만족한 그릇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다만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얘기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족하면 끝이란 얘기를 아들에게 전하곤 하지요."
칠순을 바라보는 거장의 남은 꿈은 세계에 한국 도자기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알리는 것이다.
매년 일본이나 독일 등 외국을 찾아다니며 전시회를 열고는 있지만 아직 홍보 부족 등으로 미흡하다는 게 김씨의 생각이다.
김씨는 "한국 도자기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다"면서 끊없는 도전정신을 드러냈다.
sds123@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6/09/25 16:27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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