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지킴이

(11) 자수 달인 최유현씨

바보처럼1 2007. 8. 8. 21:08
▶한국의 名人◀ (11)자수 달인 최유현씨
(부산=연합뉴스) 민영규 기자 = "후대에 남길 현재의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생각으로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아 하루하루가 아깝습니다"
칠십 평생을 자수와 함께 해왔지만 아직도 도전해 보고 싶은 자수가 더 많다는 '바느질의 달인' 최유현(崔維玹.70.여)씨.

   부산시 금정구 부곡동의 한 빌딩 7층에 마련된 자수연구원에서 단아한 한복차림으로 자수 밑그림을 그리고 있던 최씨는 온화한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 취재진을 자신이 평생을 두고 발전시켜온 자수의 세계로 안내했다.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으로 지정된 최씨는 1936년 2월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있어 무엇이든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는 그는 열다섯 살 때 모친에게 취미로 자수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여진 가느다란 실이 꽃이나 새 등으로 변해가는 자수의 매력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신이 자수에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는 그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목포로 피난 온 자수의 대가 권수산 선생이 운영하는 '목포 가정여숙'에 입학, 자수 전문가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다 권 선생을 따라 부산으로 옮겨와 중.고교에서 학생들에게 자수를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고, 이는 권 선생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독립하는 계기가 됐다.

   10년 가량 교직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작품활동에 정진해 국전(國展)에서 두 차례나 입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국내는 물론 미국과 일본에서 수차례 개인전과 초대전을 열었으며 각종 전국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최씨의 작품에 대한 욕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하기 위해 1963년 교직을 그만두고 자수학원을 열었다. 당시 3부제로 운영해야 할 정도로 학원생이 많았다고 한다.

   이듬해인 1964년에는 자수를 이용한 관광상품 판매점을 열었다. 그는 수입의 대부분을 무료로 자수를 가르친 학원 운영비로 사용할 정도로 자수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최씨가 평범한 자수인이 아닌 무형문화재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 도전적인 창작활동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후 사회적으로 만연했던 우리 문화에 대한 경시 풍조가 자수에도 고스란히 반영돼 밑그림은 대부분 일본풍이었다.

   그러나 30대에 접어든 최씨는 도자기와 민화, 산수화 등 '우리 것'을 밑그림으로 시도했고, 이는 당시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최씨는 "자수는 바느질 솜씨와 색감도 중요하지만 디자인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따라하기만 하면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할 수 없고, 자신의 세계가 없는데 어떻게 지겨운 바느질을 계속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어 최씨는 서서히 불교문화로 눈을 돌려 30대 후반부터는 밑그림을 모두 불화(佛畵)로 장식하게 된다.

   이 작품들은 하나를 완성하는 데 제자 3~4명과 공동작업을 해도 평균 2~3년, 길게는 8년이라는 세월이 걸리는 대작들이었다.

   워낙 큰 작품들이어서 수틀에다 천을 걸어놓고 중간부터 작업을 한 뒤 서서히 가장자리로 이동하며 마무리하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필요한 수틀은 직접 고안하고 제작했다.

   그의 작품은 하나하나가 오랜 시간을 두고 수도하는 마음으로, 수 없이 많은 색깔의 실을 사용하며 수십만 땀의 바느질을 통해 완성되기 때문에 보는 이에게 정밀사진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최씨는 "아름다운 우리 문화는 불교문화로 승화됐다"면서 "조상이 남긴 문화재를 보고 우리가 감탄하듯이 후대에 남길 현재의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생각으로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한다"고 말했다.

   전통에 대한 최씨의 고집은 제작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수를 놓는 위치에 따라 실의 굵기를 달리해야 하는데 그는 지금도 실을 직접 꼬아 굵기를 조절한다.

   또 최씨에게 자수를 배우러 온 제자는 첫해를 실을 꼬고 소품을 정리하는 기초작업에만 매달려야 한다.

   이 때문에 많은 제자들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중간에 배움을 포기하기도 했지만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는 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최씨가 단순한 장인에 그치지 않고 무형문화재로 인정받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30대 후반부터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며 완성한 작품을 내다 팔기를 거부했다.

   누군가에게 팔면 많은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작품이 훼손될 우려도 있고, 후손들이 누구나 마음 놓고 감상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이 때문에 최씨는 현재 소장하고 있는 100여 점의 작품을 언젠가 전국 순회 전시회를 통해 일반에 공개한 뒤 박물관 등에 기증할 계획이다.

   최씨는 "자수를 통해 돈을 벌었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었던 작품활동, 어느 누구도 하지 않는 작품활동을 하며 오로지 자수에만 돈을 쏟아부을 생각"이라면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아 하루하루가 아깝다"며 손가락 끝마다 굳은 살이 박인 오른손을 살며시 감췄다.

   youngkyu@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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