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뜨락

적 멸

바보처럼1 2007. 11. 23. 23:28
적 멸

    최 금 녀

 

 

비 그친 뒤 잔디밭 여기저기에

흙거품이 솟아났다

지렁이가 뚫어놓은 숨구멍이다

불볕이 비오듯 쏟아지고

하늘도, 숨구멍도, 잔디밭도

수런거리는데

지렁이는

배 뒤집고 누워 꼼짝 않는다

습기 찬 땅속보다는

숨통이 트인다는 뜻일까,

비 지나간 하늘

초록이 짙푸르게 일어나고

짙푸른 초록 위에 길게 누워

이제는 그만 잠이 들고 싶은 걸까

밀어올린 숨구멍들 그대로 놓아두고

햇볕 속에서 말라간다

온몸 늘어뜨리고

손도 눈도 없이.

 

―신작시집 ‘큐피드의 독화살’(종려나무)에서

 

 

▲1997년 ‘문예운동’으로 등단

▲시집 ‘저 분홍빛 손들’ ‘가본 적 없는 길에 서서’ ‘들꽃은 홀로 피어라’ 등

▲한국문학비평가 협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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