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가

김 영랑........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바보처럼1 2006. 5. 30. 22:32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뻔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시문학창간호(1930.3)수록

"강물"은 근원적인 생명의 흐름.

"강물이 흐르네"는 마음에 벅찬 환희를 나타낸다.

*주제는 환희로운 내 마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저ㅕ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잡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도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 ㅎ 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문학3호(1934.4)수록

모란을 소재로 한 유미주의적 명시

모란은 봄일 수도 있고 이상일 수도 있다.

*주제는 미적 세계의 동경

 

 

<언덕에 바로 누워>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읍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야 너무도 아슬하야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 때라도 없드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기었네 감기었네

 

*시문학 창간호(1930.3)수록

*주제는 사모하는 마음.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앏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시문학 2호(1930.6)수록

인간의 감정 일체가 씻겨 나가고, 원색 서정만이 아름답게 빛나는 시이다

소재는 봄하늘,

*주제는 봄날의 애닯은 그리움의 정.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뱆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이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시문학 3호(1931.3)수록

내 마음을 나처럼 알아 주 임을 염원한 노래이다.

*주제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고독감

*희미론: 희미한.아리송한.

*티끌: 고뇌와 번뇌

*보람: 사랑

 

 

<4행시>

                        1

임 두시고 가는 길의 애끈한 마음이여

한숨 쉬면 꺼질 듯한 조매로운 꿈길이여

이 밤은 캄캄한 어느 뉘 시골인가

 이슬같이 고인 눈물을 손끝으로 깨치나니

                         2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인다

                       3

좁은 길가에 무덤이 하나

이슬에 젖이우며 밤을 새인다

나는 사라져 저 별이 되오리

외아래 누워서 희미한 별을

                     4

저녁 때 저녁 때 외로운 마음

붙잡지 못하여 걸어다님을

누구라 불어 주신 바람이기로

눈물을 눈물을 빼앗아 가오

                        5

무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 만뿐이구려

희끗희긋 산구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닯다 속삭이느뇨

                        6

뵈지도 않는 입김에 가는 실마리

새파란 하늘 긑에 오름과 같이

대숲의 숨은 마음 기여 찾으려

삶은오로지 바늘 끝같이

                      7

퓨룬 향물 흘러버린 언덕 위에

내 마음 하루살이 나래로다

보실보실 가을눈(眼)이 그 나래를 치며

허공의 속삭임을 들으라 한다.

                       8

허리띠 매는 시악시 마름실같이

꽃 가지에 은은한 그늘이 지면

흰 날의 내 가슴 아지랭이 낀다.

흰 날의 내 가슴 아지랭이 낀다.

 

*주제는 1번이 임과 이별한 설움

8번의 주제는 봄철의 아늑한 마음.

 

 

<5월>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프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 이랑 민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 빛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버리련?

 

*문장6호(1936.7) 수록

5월의 햇볕 아래 전개되는 풍경을 묘사한 시

즐겨 사용된 문장의 수사법은 활유. 영랑의 시는 음악성에 그 특성이 있는데, 이 시는 오히려 회화적이어서 차라리 모더니즘의 시에 가깝다.

 

 

<땅거미>

 

가을날 땅거미 아름풋한 흐름 위를

고요히 시리우다 훤뜻 스러지는 것

 

잊은 봄 보라빛의 낡은 내음이요

임의 사라진 천 리 밖의 산울림

오랜 세월 시닷긴 으스름한 파스텔

 

애닯은 듯한

좀 서러운 듯한

 

오! 모두 다 못 돌아오는

머언 지난 날의 놓친 마음

 

 

<묘비명>

 

생전에 이다지 외로운 사람

어이해 뫼 아래 뉘돌 새우오

초조론 길손의 한숨이라도

헤어진 고총에 자주 떠오리

날마다 외롭다 가고 말 사람

그래도 뫼 아래 빗돌 세우리

"외롭건 내 곁에 쉬시다 가라"

한되는 한 마디 새기실난가

 

*조광(1939) 수록

영랑의 시 가운데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이 체취가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도 하다.

 

 

<4행시(초)>

 

30

님 두시고 가시는 길의 애끈한 마음이여

한숨 쉬면 깨질 듯한 조매오룬 꿈길이여

이 밤은 캄캄한 어느 뉘 시골인가

이슬같이 고인 눈물을 손끝으로 깨치나니

                           31

허리려 매는 시악시 마음실같이

꽃가지에 은은한 그늘이 지면

흰 날의 내 가슴 아지랭이 낀다

흰 날의 내 가슴 아지랭이 낀다

                         35

숲 향기 술길을 가로막아 있소

발 끝에 구슬이 깨이어지고

달 따라 들길을 걸어 다니다

하룻밤 여름을 새워 버렸소.

                          38

산골을 놀이터로 커난 시악시

가슴 속은 구슬같이 밝으련마는

바라뵈는 먼 곳이 그리움인지

동무인 채 산길에 섰기도 하네

                          39  

그 색시 서럽다 그 얼굴 그 눈동자가

가을 하늘가에 도는 바람 섞인 구름 조각

핼쑥하고 서느러워 어디로 떠갔으랴   

그 색시 서럽다 옛날의 옛날의

                           43

미움이란 말 속에 보기 싫은 아픔

미움이란 말 속에 하잔한 뉘우침

그러나 그 말씀 씹히고 씹힐 때

한 거품 넘치어 흐르는 눈물

                         46

밤이면 고총 아래 고개 숙이고

낮이면 하늘 보고 웃음 좀 웃고

너른 들 쓸쓸하여 외론 할미꽃

아무도 몰래 지는 지친 새벽별

                          50

언덕에 누워 바다를 보면

빛나는 잔물결 헤일 수 없지만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얼굴

뵈올 적마다 꼭 한 분이구려

                          51

바람에 나부끼는 깔잎

여울에 희롱하는 깔잎

알 만 모를 만 숨 쉬고 눈물 맺은

내 청춘의 어느 날 서러운 손짓이여

                           53

저 곡조만 먼저 호동글 사라지면

물 속의 구슬을 물 속에 버리려니

해와 같이 떴다 지는 구름 속 종달은

새날 또 새론 섬 새 구슬 머금고 오리

 

*김 해성은 영랑의 '4행시' 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첫째, 영랑 시인의 시 작품의 밑바탕이 되어 있는 슬픔은 동양적이며 한국적인 전통의 슬픔이 깔려 있는 내심의 맑은 향기 같은 시 세계이며, 둘째, '4행시' 안에 있는 언어는 한 개 한 개가 생생하게 살아서 호흡을 하는데, 그 호흡은 시를 이루는 동맥과 정맥으로 구분되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고, 세째, 순화된 율격의 언어들이 심정적 해학미를 띠고 있어, 읽는 사람에게 잔잔한 강심(江心)같은 시정을 체득(體得),감지케 한다. 네째, 전라도 사투리가 영랑시인의 마음에 와서 문법적인 규범을 벗어나 음악적인 요소 -시각미와 청각미의 결합 조화로 어색하지 않는 미감을 일으키게 했고, 다섯째, ' 4행시' 의 짧은 형태구조인데도 시상과 시형이 꽉짜여져 있어 한 단어, 한 자의 토씨도 버릴 것 없는 순수한 "금은(金銀) 언어" 같은 빛과 호흡이 조직적이었다.

여섯째, 영ㅇ랑 시인의 생활과 인간과 정신의 삼위 일체적인 시 창작이었고, 평범한 정금옥(精金玉)의 차가운 듯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뜨거운 사랑의 정신이 시편 속에 연연히  맺혀 흐르고 있다."

 

 

<가늘한 내음>

 

내 가슴 속에 가늘한 내음

애끈히 떠도는 내음

저녁해 고요히 지는 제

머언 산 허리에 슬리는 보라빛

 

오! 그 수심뜬 보라빛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

한이틀 정열에 뚝뚝 떨어진 모란의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

 

얼결에 여읜 봄 흐르는 마음

헛되이 찾으려 허덕이는 날

뻘 위에 처얼썩 갯물이 놓이듯

얼컥 니이는 후끈한 내음

 

아! 후끈한 내음 내키다 마아는

서언한 가슴에 그늘이 도오나니

수심 띠고 애끈하고 고요하기

산허리에 슬리는 저녁 보라빛

 

*시문학2호(1930.6) 수록

이 시를 순수시라 하는 까닭은, 형식면에서 볼 때 운율 중심의 시어를 썻기 때문에.

내용면에서 볼 때 순수한 서정을 읊었기 때문이다.

 

 

<오-매 단풍 들것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래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영랑시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 중의 하나.

유리반에 옥을 굴리는 듯 매맑기 그지없는 가락, 아울러 아름답기 그지없는 시상(詩想)이 전개된다.

 

 

<독(毒)을 차고>

 

내 가슨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엇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다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 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문장 10호(1939.11) 수록

"독"이란 죽음의 각오를 뜻한다.

종달새처럼 아름다운 가락으로 노래부르던 영랑이 이렇듯 억센 시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의 압제가 그만큼 도를 더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주제는 죽음의 각오.

 

 

<춘 향>

 

큰 칼 쓰고 옥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는 옛날 성 학사(成學士) 박 팽년이

불짖임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단심

 

원통 ㅎ 고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 첫날 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설움이 사무치고 지쳐 쓸어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은 불리워 나왔으니

논개!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단심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냥 옥사하단 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 학도의

흉칙한 얼굴에 까물아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 주는 도련님 생가

오! 일편 단심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을 세오다가 그는 그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 단심

 

깊은 겨울 밤 비바람은 우루루루

피칠해 논 옥 창살을 들이치는데

옥 죽음한 원귀들이 구석구석에 휙휙 울어

청절(淸節) 춘향도 혼을 잃고 몸을 버려 버렸다.

밤 새도록 까무러치고

해 돋을 녘 깨어나다

오! 일편 단심   

 

믿고 바라고 눈 아프게 보고 싶던 도련님이

죽기 전에 와 주셨다 춘향은 살았구나

쑥대 머리 귀신 얼굴 된 춘향이 보고

이 도령은 잔인스레 웃었다. 저 때문에 정절(貞節)

이 자랑스러워

"우리 집이 팍 망해서 상거지가 되었지야"

틀림없는 도련님 춘향은 원망도 안 했니라

오 ! 일편 단심

 

모진 춘향이 그 밤 새벽에 또 까무라쳐서는

영 다시 깨어나진 못했었다, 두견은 울었건만

도련님 다시 뵈어 한은 풀었으나 살아날 가망은 아주 끊기고

왼몸 푸른 맥도 홱 풀려 버렸을 법

출도 끝에 어사는 춘향의 몸을 거두며 울다

" 내 변가보다 잔인무지하여 춘향을 죽였구나"

오! 일편 단심 

 

*문장2권 7호(1940.7) 수록

이 시에서 춘향을 조국으로, 이도령은 광복으로, 변 학도는 일제로 해석하연 그 내용이 선명해진다. 원작과는 달리 춘향이 죽은 것으로 처리한 것은 그만큼 시대가 암담했음을 가리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