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지킴이

[스크랩] 수천 번의 헛손질을 통해 한 동작을 완성하는 치열한 춤꾼 정재만

바보처럼1 2006. 6. 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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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재만이는 우리 할아버지 닮은 데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내가 보람을 느낍니다.”
그의 스승인 한영숙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말이다. 당대 춤계의 가장 큰 별이었던 한영숙 선생은 민속춤을 예술춤으로 승화시킨 자신의 할아버지 한성준 선생을 닮은 제자로 정재만을 꼽으며 그를 극찬하였다. 어떻게 그는 스승에게 이러한 큰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

정재만은 1948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유난히 동네에 굿판이 많이 벌어졌는데, 5~6살부터 굿을 본 날이면 집에 돌아와 무당 흉내를 내면서 춤을 추었다. 이때부터 그의 춤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옹기를 만드셨던 아버지의 예술적인 끼를 그대로 물려받은 바탕 아래 한영숙 선생을 만나 그 끼를 예술적으로 다듬어갔다.
한영숙 선생이 그를 가르치는 방법은 아주 자연적이었다고 한다. 좁은 방에서 한 마디 장단을 하루 종일 반복해서 추게하고 다 익혀야 또 한 마디를 나갔는데, 마치 한 나무에서 곁에 있는 다른 나무로 폴짝 어미새가 날아가면 새끼새가 따라 날아오듯 하는 교육방법이었다. 놋그릇을 반복해서 닦아야 빛나는 것처럼 반복해서 춤을 익히는 과정이 그가 스승에게 받은 춤수업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대로 된 손동작 하나 나오려면 수천 번의 헛손질을 통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가 연습벌레, 연습귀신이라고 불리며 지금까지 새벽 6시 연습을 거르지 않고 있는 것이 그 반증이다.
1대 벽사 한성준 선생은 산재해 있는 민속춤을 예술무용으로 올려놓았고, 2대 벽사 한영숙 선생이 그것을 이어받아 우아하고 단아하게 전통춤을 갈고 닦아 나갔다면, 3대 벽사 정재만은 그 춤을 크게 확장하고 템포를 변화시켜 활달하고 폭이 너른 춤을 추려는 과제를 스스로 설정했다. 이러한 모색은 전통춤을 이 시대의 대중과 함께 소통하려는 생각에서 나왔다. 전통춤이라 불리는 춤도 처음 나왔을 때는 당대의 새로운 형식이었듯이 우리 전통춤을 창조적으로 계승해 나가는 것이 현재 춤꾼들의 몫임을 각인하고 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춤은 <승무>이며 <승무>를 자신의 인생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2000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한영숙 선생이 <승무> 하나만 잘 추면 다른 춤이 다 된다고 하였을 때만해도 그 의미를 잘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승무>의 염불-타령-굿거리-법고-굿거리의 5과장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을 만큼 그는 이제 <승무>와 하나가 되었다. 처음에 엎드려 시작하는 염불장단의 춤은 아이가 눕다가 엎쳤다가 기는 모습을 나타낸 듯 하고, 타령장단에서는 일어나 뛰고 활동하는 청년의 모습을, 굿거리장단은 황혼기에 접어드는 인생을 나타낸 듯하다고 그는 해석한다. 또한 염불은 크고 높고 우아한 산맥같고, 타령은 경상도의 덧배기처럼 톡톡 끊고 부러지며, 굿거리는 전라도 평야처럼 잔잔하고 아기자기하고, 법고가락은 거세게 몰아치는 인생의 시련같다고 한다. 승무를 딱 꼬집어 이것이다라고 결론지을 수 없지만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큰 산이 각도마다 다른 모습을 품고 있듯, 큰 춤 <승무>도 다양함을 껴안고 있는 것이다.

창작춤에도 그는 관심이 많다. 한동안은 창작춤 춘다고 한영숙 선생에게 ‘지랄춤’ 추고 있다고 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지랄이 어떻게 보면 나쁘지만 자기 속에 있는 걸 드러낸다는 입장에서 보면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만큼 뚝심도 있었다. 젊었을 때니까 활기있게 한번 춤춰 보려했던 그는 연륜이 쌓이면서 전통춤의 기법 속에서 창작을 끌어내려고 고민한다. 앞으로도 그는 <승무>, <살풀이>, <태평무>에서 어떤 요소를 꺼내어 창작과 연결시키는 시도를 계속할 것이며, 이는 우리춤을 변질·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우리 춤을 계승 발전시키는 길이라고 본다.
한국무용은 여자들만 추는 것, 기생들이나 추는 것이라는 인식 속에서 남자로 춤을 추는 것이 고독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성준·조택원 선생 등 남성춤꾼들도 있으니 활달한 춤을 만들어 남성적인 맛과 멋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정재만남무단을 만들었다. 남무단에서 <훈령무>라든가 활달한 춤을 개발했고, 그런 모습을 보고 춤을 시작한 남자춤꾼도 생겼다. 그러나 아직도 남자로서 춤꾼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제자들이 춤계를 떠날 때 그는 가장 슬프다.

하루 종일 춤을 추고 춤과 관련된 일상을 살면서도 그는 지치지도 힘들지도 않다고 한다. 숙대전통문화대학원 교수·벽사춤아카데미·삼성무용단·한국의 집 등에서 빡빡한 일정을 보내지만 가르치는 것이 즐겁고, 춤동작이 잘 되지 않던 제자의 실력이 늘어가는 것이 기쁘기 때문이다. 후학들에게도 자기 삶이 춤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늘 푸른 소나무가 되라”고 제자들에게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춤연습하는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만 춤추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춤을 생활화하면 훌륭한 춤꾼이 될 것이라고 당부한다.
앞으로 그는 전통춤을 잘 전수할 수 있는 전수회관을 갖고 싶다고 한다. 전통의 맛을 살려 지은 건물에 늘 연습하고 전수받을 수 있는 곳이 생기길 꿈꾼다. 무용전용극장, 무용박물관을 만드는데도 애쓰겠다고 한다. 또 초등학교부터 우리춤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게 힘쓰고 싶다고 한다.

그가 걸어온 춤길은 <논어>의 ‘일이관지(一以串之)’로 요약될 수 있다. 춤으로써 그의 삶은 수미일관하게 꿰어진다. 그는 춤의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보며, 세상의 모습은 다시 춤으로 응축되어 나타낸다. 우직하게 춤의 한길로만 걸어왔고 하루하루의 성실함으로 축척된 시간의 깊이가 느껴지는 그는 우리시대의 소중한 춤꾼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한치의 의심도 없이 충만한 기쁨을 느끼는 얼굴을 참 오랜만에 봤다. (자료출처/문화예술종합정보)

출처 : 하늘을 보세요. 그 곳에 꿈이 ~
글쓴이 : 늪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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