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군 종천면에 가면 희이산이 있다. 이 산은 산전체가 해송천연림으로 경관이 수려하고 입구에 저수지가 위치하여 낚시를 겸한 산림휴양이 가능하다. 등산로를 따라 정상에 올라가면 서해바다를 관망할 수 있고 춘장대 해수욕장, 금강하구둑 및 한산 모시타운 등이 근거리에 위치하여 주변관광지와 연계이용이 가능하다. 희리산은 해발 329m로 최고봉은 문수봉이며 휴양림 북서쪽에는 네 장사가 놀던 자리인 사인대가 있다. 사인대 밑에 140m의 절벽이 있는데 장사가 턱걸이한 장소가 있어 턱걸이장이라 칭하고 문수봉 밑에는 빈대가 하도 많아 절을 헐었다는 문수사 절터가 현재도 있다. 문수봉 남쪽으로 500m 전방에 전사들이 말을 타고 달리던 장소가 능선따라 있고 동남쪽 500m 전방에 말이 똥을 싼 것같은 말똥바위의 형태가 있다. 특히 문수봉 밑으로 네장사가 거처하던 큰 산봉우리 4개가 있고, 그 밑으로는 졸병들이 거처하던 작은바위 100여개가 있어 졸병바위라고 부르는 등 바위의 생김새가 여러 가지 형태의 모양을 이루고 있어 희리산에서 문수봉에 이르는 등산로 주변에는 많은 볼거리가 있다.
종천면 도만리에는 우리나라의 대명창이었던 이동백(李東伯, 1867-1950)의 생가지가 있다. 이동백 명창은 전무후무한 명창이라고 칭할 만큼 대단한 가창력을 갖고 있었으며 그 용모 또한 준수하여 당시 그 이름만 들어도 극장에 관객이 미어질 정도였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분이시다. 고 박동진 선생은 “이동백 명창이야 말로 신재효의 광대가에 나오는 광대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신 분이다”라고 생전에 술회 하신 적이 있다. 이동백명창은 가난이 싫어서, 소리를 하면 임금의 어전에 나가 소리를 할 수 있고, 양반집도 마음대로 드나들며 밥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소리에 희리산 중턱 동굴에서 2년동안 독공으로 득음을 했다고 전해진다. 피를 토하는 동굴독공이야 말로 명창들이 꼭 거쳐야한다는 득음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는데 이동백 명창은 그렇게 동굴독공을 마치고 소리판에 나섰다고 한다.
“마지막 내 소원(所願)은 판소리의 근본정신을 모르고 음탕한 노래로 알고 부르며, 또 그런 것을 듣기 좋아하는 것이 기가 막히고, 또 하나는 소리하는 사람을 아직 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천대하는 것이 일생동안 내 가슴에 사무친 기막힌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암만 생활문제가 급하여도 우리의 권위도 세워서 요리집에는 가지 않고 회관에 와서 듣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좀 더 서로 연구하고 개량하야 새로운 작(作)도 하고 발표도 하려고합니다.” (1937년 3월 이동백이 72세에 대담한 내용 중에서)
8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문을 공부한 이동백 명창은 13세 때에는 김정근(金正根)문하에 들어가 판소리를 공부하고, 다시 김세종(金世宗)에게 5년간 공부하였다. 20세 전후에 도만리 희리산의 용구(龍口)에서 2년간 독공(獨工)하였고, 다시 진주 이곡사(里谷寺)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하였다. 절에서 나오자 창원부사의 부름을 받고 새타령을 불러 이름을 떨쳤다. 36세 이후 경상남도 창원에서 사는 동안 명창으로 차츰 알려지게 되었다. 46세 때 서울로 올라와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과 함께 원각사(圓覺社)에서 창극을 공연하였고, 원각사가 해산된 뒤 연흥사(延興社)·광무대(光武臺) 등에서 송만갑과 함께 창극과 판소리를 공연하였다. 1933년 송만갑·정정렬(丁貞烈)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여 판소리교육에 힘쓰는 한편, 창극정립에도 노력을 경주하였다. 1939년 부민관에서 은퇴공연을 하자,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두달 동안이나 전국과 만주, 연해주일대까지 순회공연을 계속하였다. 그는 김세종에게 짜임새 있게 판소리를 배웠고, 성량이 풍부하고 풍채가 당당하여 거인적인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 고종은 그를 특히 사랑하여 통정대부의 직계를 내렸고, 어전에서 소리를 하게 하였다.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고, 특히 새타령을 잘 하였는데, 그의 새타령은 이날치(李捺致)·박유전(朴裕全)이후 첫손을 꼽고 있다. 제자는 많지 않고 강장원(姜章沅)이 그의 소리 일부를 이어받았으나 병사하여 맥이 끊겼다. 그의 소리를 담은 음반이 수십 종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새타령과 흥보가 중 ‘제비 후리려 나가는 대목’, 심청가 중 ‘범피중류(泛彼中流)’ 대목이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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