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가

눈 오는 밤에................김 용호

바보처럼1 2006. 8. 1. 19:31

<눈 오는 밤에>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콩기름 불

실고추처럼 가늘게 피어나던 밤

 

파묻은 불씨를 헤쳐

잎담배를 피우며

 

"고놈, 눈동자가 초롱 같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

바깥엔 연방 눈이 내리고.

오늘 밤처럼 눈이 내리고.

 

다만 이제 나 홀로

눈을 밟으며 간다.

 

오우버 자락에

구수한 할머니의 옛 얘기를 싸고,

어린 시절의 그 눈을 밟으며 간다.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시골의 정취를 소재로 한 시

내용상 기승전결로 나눌 수 있다. 즉, 1/2. 3.4/5.6/7이 된다.

아늑함과 외로움과 정다움을 느끼게 해 주는 서정시

*주제는 눈 오는 밤의 서정.

 

 

 

<오월의 유혹>

 

곡마단 트럼펫 소리에

탑은 더 높아만 가고

유유히 젖빛 구름이 흐르는

산봉우리

분수인 양 치오르는 가슴을랑

네게 맡기고 사양에 서면

풍겨 오는 것

아기자기한 라일락 향기

계절이 부푸는 이 교차점에서

청춘은 함초롬이 젖어나고

넌 이브인가

푸른 유혹이 깃들여

감미롭게 핀

황홀한

5월

 

*시집 향연(1941) 수록

이 시는 뻗쳐오르는 생명감과 충만한 정감의 두 갈래 흐름을 짜여져 있다..

낭만적이며 감각적인 정세를 상징적 수법으로 표현한 시.

*주제는 5월이란 계절적 상황을 통한 생명의 충일감.

 

 

<5월이 오면>

 

무언가 조용히

가슴 속을 흐르는 게 있다.

가느다란 여울이 되어

흐르는 것.

 

이윽고 그것은 흐름을 멈추고 모인다.

이내 호수가 된다.

아담하고 정답고 부드러운 호수가 된다.

푸르름의 그늘이 진다.

잔 무늬가 물살에 아롱거린다.

 

드디어 너, 아리따운

모습이 그 속에 비친다.

 

오월이 오면

호수가 되는 가슴

 

그 속에 언제나 너는

한 송이 꽃이 되어 방긋 피어난다.

 

*순수하고 감미롭고 소녀적인 정감으로 그리움을 노래하였다.

주제연은 끝연

끝 줄의 "꽃"은 아름다운 법열을 안겨 주는 소녀상이다.

*주제는 그리움

 

 

<가을의 동화>

 

호수는 커다란 비취,

물 담은 하늘

 

산산한 바람은

호젓한 나무잎에 머물다

구름다리를 건너

이 호수로 불어 온다.

아른거리는 물무늬.

 

나는

하 마리의 잠자리가 된다.

나래에 가을을 싣고 맴돌다

호숫가에 앉으면

문득 고향.

 

고향은 가을의 동화를

가만가만 내게 들려 준다.

 

*가을날, 맑고 고요한 호숫가에서 고향 생각에 잠겨 쓴 시. 생에 대하여 담백하고 아무 구김살 없는 관조의 자세로 노래하고 있다.

*소재는 가을의 호수

주제는 어린 날의 추억과 향수

 

 

<고 개>

 

뿔뿔이 헤어진 고개 위 쌍갈랫길

찢어진 고무신 뒤축이 무거워

서린 눈알을 돌려 내려보는 고향은

잘 가란 말도 없어

 

보일 듯 잡힐 듯 행복이 가로놓인 북쪽하늘

쫓기듯 숨차게 이 고개에 올라선 그날의 그들

허나 모종방 이야기 속엔 아직도 달갑은 소시 까마듣해

 

뭉게뭉게 쌓이는 눈은 향수에 얼어 붙고

북풍이 자즈라지게 매운데

오늘도 고개 위엔 발자욱이 그려져

 

고개는 이제 적막을 안은 채 어둠을 불려

하나 둘 하나 둘 발자욱을 헤는데

가도 올 줄 모르는 게 서러워 서러워

 

*일제 시대 북만주에 강제이민을 당하던 모습을 노래한 시.

 

 

<경사진 일요일에>

 

맑은 햇살의 소나기가

녹음을 씻는

일오일 오후의 창경원.

 

아빠,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고만고만한 또래의 어린이의

부픈 행복한 얼굴,얼굴,

 

나도 희(禧)의 따뜻한 손을 잡고

이 흥겨운 물결 속에 휩싸인다.

내 손이 차다.

어쩐 일일까.

희는

풍선을 사 달란다.

둥,둥 뜨고 싶은 심정인가 보다.

 

놀이터에 가서

역마차를

문어다리를

비행기를

우주사이클을

티파티를

차례 차례 모두 탄다.

 

순간, 긴 세월을 되돌아가서

나는 환상의 어린이가 된다.

신나는 시간이다.

 

희는

케이블카를 타고

건너쪽으로 가서

그네를 타고

목마를 타고

하니문카를 또 타잔다.

 

하니문카 ?

"그건 안 돼 아직 넌 멀었어

아마 아빠는 그땐 없을 거야"

환상의 어린이는 곧장

현실의 어른이 된다.

내 손이 찬 것은

그 때문일까?

 

시간의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며

한 동안 나는 나를

착각한 곡예사였나 보다.

 

경사진

일요일 오후의 창경원.

 

 

<초원에서>

 

굴레를 벗고 보면

한결 시원한 바람

 

오르내리며

멀리 달리고만 실은

초원의 푸르름

 

백록담에 뛰어올라

신비를 안고

하이얀 구름에 영상되는

목마(牧馬)의 모습

 

세상 굴레를 모두 벗고

나도 너희들 함께 살랴

초원의 이 푸르름 속에서

 

*"시는 재치로 쓰는 것이 아니다. 시는 가슴으로 써야 한다" 는 자신의 지론을 지켜 나간 김 용호의 처녀작은 '첫여름 밤 귀를 기울이다'라는 시이다.

 

 

<한 상 보(寒想譜)>

 

언덕 옆을 끼고 달아난 철로를 따라

고향의 모습이 눈썹 위에 삼삼거린다

그리움과 미움.

 

맥없이 하늘이 어둠을 부르면

내 마음 한 구석에도 철 늦은 비가 내린다

오늘.

짝밤을 나누면서 옛 이야기에 뜬 눈을 새운

고향의 사랑방 삿자리 밑은 따뜻도 하였다.

 

그이 몰래 책 속에 넣어 준 은행잎

황혼의 처마 끝에 추억을 물들인다

한 잎 두 잎.

 

머얼리 성선(省線) 전차의 기적이 비명처럼 들릴때

불안이 홈 파는 가슴 속의 처의, 절망

자취 도구가 할 일 없이 이틀째 쉬는 방 한 구석

동면할 수 있는 동물이 부러운

요즈음.

 

 

<시가, 시가 되지 않는 >

 

앞가슴에 단

해바라기 훈장을 떼어버리고

나는 시인이란 칭호를 거부한다.

 

시가 시로서 꽃필 수 없는

낭떠렂지.한류의 동토(凍土).

나는 아무래도

식민지의 때를 여지껏 벗을 수가 없다.

이빨 사이로 새어 나는 휘파람은

체중 가벼운 빌딩 위를 날으는

후조의 날개,

 

너는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지만

나는 아무래도

긍정의 축포를 울릴 수 없다.

 

불연속선의 기압골은

큼지막한 하마의 입아가린가

한발(旱魃)은 논밭에서 가슴으로 균열하고

나는 알 못 밴 깜부기가 되어

이 결실의 가을에서 추방됐다.

 

환산하면 모두들

40불(弗)의 싼 목숨.

못 다한 생명은 죽음으 처마 끝에서

소슬한 빗방울에 만가(輓歌)를 싣고

풀벌레 소리는 바로 통곡이다.

미각(味覺)이 마비된 이 초가을 밤에

텁텁한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메스꺼운 세월을 넘기노라면

 

호되게 이마빡을 까인 토끼의 달도

뜻 아니한 균열에 신음하는가

피투성이가 되어 흐르는 구름.

 

검은 눈동자에도 핏발이 선다.

아프다.쓰리다. 아우성치는 바다

무너지는 가슴의 기슭에 부딪쳐 오는

바다, 그 넓다란 해원은 내것이다.

 

두고두고 오랜 세월을 누벼

중성(中性)의 백의에 빛바랜 내 시는

아무래도 시다운 시일 수는 없는

이단을 잉태한

물결.

 

시가, 시가 되지 않는 내 시여 !

 

앞가슴에 단

해바라기 훈장을 떼어 버리고

시인이 되다 못 된 슬픈 영광을 위해

 

시가, 시가 되지 않는 내 시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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