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 상>
1
향료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머언 고가선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라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조선일보(1939.7.9) 수록
소재는 전신주-구름 -들길. 그소재를 통해 정적을 그려내고 있다.
*주제는 해질 무렵의 아름다움과 고독감.
*데상: 소묘(素描). 형태와 명암을 주로 하여 단색으로 그린 그림
<설 야(雪夜)>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ㅁ 소리없이 흩날이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조선일보(1938.1)수록
눈 오는 밤의 정경과 추억을 감각적으로 노래하였다.
모더니즘의 시인지라 시각적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주지적인 시는 주관을 배격하게 마련인데, 이 시 끝줄에는 그 주관이 들어 있다
*주제는 눈 오는 밤의 추억과 애상.
<와사등>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 해 황망히 날개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누물겹구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조선일보(2936.6.3)수록
이 시의 무드는 우수에 차 있다.
어두운 거리에 걸려 있는 등불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것이다.
3연 1행에는 공감각적 이미지가 표현되었다.
*주제는 도시 문명에 대한 현대인의 절망과 비애
*와사등: 가스(gass)등
<오후의 구도(構圖)>
바다 가까운 노대(露臺)위에
아네모네의 고요한 꽃망울이 바람에 졸고
흰 거품을 몰고 밀려드는 파도의 발자취가
눈보라에 얼어 붙은 계절의 땅 밖에
나즉이 조각난 노래를 응얼거린다.
천정에 걸린 시계는 새로 두 시
하이얀 기적 소리를 남기고
고독한 나의 오후의 응시 속에 잠기어 가는
북양 항로의 깃발이
지금 눈부신 호선(弧線)을 긋고 먼 해안 위에 아물거린다.
긴 뱃길에 한 배 가득히 장미를 싣고
황혼에 돌아온 작은 기선이 부두에 닻을 내리고
창백한 감상(感傷)에 녹슬은 돛대 위에
떠도는 갈매기의 날개가 그리는
한 줄기 보표(譜表)는 적막하려니.
바람이 불 적마다
어두운 커어튼을 새어 오는 보이얀 햇볕에 가슴이 메어
여윈 두 손을 들어 창을 내리면
하이얀 추억의 벽 위엔 별빛이 하나
눈을 감으면 내 가슴엔 처량한 파도 소리뿐.
*오후의 서경을 회화적인 필치로 다루었다.
적막한 해안을 바라보며 ,모더니즘의 수법으로 고독한 오후를 노래했다.
회화성이 가장 강한 대목은 3연
1연의 "조각난 노래"에는 공감각(시각.청각)이 나타나 있다.
*노대: 발코니(balcony).
*호선: 반원의 선
<외인촌>
하이얀 모색(暮色)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힌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취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다란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시집 와사등(1939.8)수록
단순한 회화적인 수법을 구사하여 이국적인 정취를 읊은 시..
맨 끝 줄은 모더니즘 시작법의 특징인 시각과 청각(공감각)이 어울려 표현된 대목이다..
*주제는 이국적인 정취
*모색: 저녁 무렵의 어스레한 빛
*산협촌: 산골짜기의 마을
<추일(秋日)서정>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 ㅎ 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로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세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홀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인문평론(1940.4)수록
가을을 제재로 하여, 현대인의 고달픈 눈에 비친 가을의 고독과 애수를 회화적인 수법으로 그려낸 시.
이시에 대해 "청각적인 것은 도시 찾아볼 수 없고, 이미지 전부가 시각적 감각이다" 고 평한 바 있다.
*주제는 가을의 애수
<언 덕>
심심할 때면 날 저무는 언덕에 올라
어두워 오는 하늘을 향해 나발을 불었다.
발 밑에는 자옥한 안개 속에
학교의 지붕이 내려다보이고,
동네 앞에 서 있는 고목 위엔
저녁 까치들이 짖고 있었다.
저녁 별이 하나 둘 늘어 갈 때면,
우리들은 나발을 어깨에 메고,
휘파람 불며 언덕을 내려왔다.
등 뒤엔 컴컴한 떡갈나무 수풀에 바람이 울고,
길가에 싹트는 어린 풀들이 밤이슬에 젖어 있었다.
*시간적 나열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었다.
서경적 묘사의 시.
소재는 고향의 언덕
주제는 어린 시절에의 향수.
<녹동 묘지(綠洞墓地)에서>
이 새빨간 진흙에 묻히어 여길 왔던가
길길이 누운 황토 풀 하나 꽃 하나 없이
눈을 가리는 오리나무 하나 꽃 하나 없이
비에 젖은 장포(葬布) 바람에 울고
비인 들에 퍼지는 한 줄기 요령(搖鈴)소리.
서른 여덟의 서러운 나이 두 손에 쥔 채
여윈 어깨에 힘겨운 짐 이제 벗어났는가.
아하,
몸부림 하나 없이 우리 여기서 헤어지는가.
두꺼운 널쪽에 못박는 소리.
관을 내리는 쇠사슬 소리
내 이마 한복판을 뚫고 가고
다물은 입술 위에
조그만 묘표(墓表) 위에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조광(1942.12)수록
이 작품을 발표할 무렵부터 김 광균의 시세계에는 허무와 회의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생이라는 것ㅇ르 비추어 볼 때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허무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은 수 저>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밤중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문학(1946.7) 수록
죽은 아기를 생각하는 부정(父情)을 노래하였다.
*주제는 아기를 잃은 부정(父情).
<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구나>
주안(주안) 묘지 산비탈에도 밤벌레가 우느냐,
너는 죽어서 그곳에 육신이 슬고
나는 살아서 달을 쳐다보고 있다..
가물에 들끓는 서울 거리에
정다운 벗들이 떠드는 술자리에
애닲다.
네 의자가 하나 비어 있구나.
월미도 가까운 선술집이나
미국 가면 하숙한다던 뉴우욕 하렘에 가면
너를 만날까
있더라도 " 김형 있소" 하고
손창문 마구 열고 들어서지 않을까.
네가 놀러 가 자던 계동집 처마 끝에
여름달이 자위를 넘고
바람이 찬 툇마루에서
나 혼자
부질없는 생각에 담배를 피고 있다.
번역한다던
'리처어드 라잇'과 원고지 옆에 끼고
덜렁대는 걸음으로 어딜 갔느냐.
철쭉꽃 피면
강화섬 가자던 약속도 잊어버리고
좋아하던 '존슨' '브라운' '테일러'와
맥주를 마시며
저 세상에서도 흑인시(黑人詩)를 쓰고 있느냐.
해방 후
수없는 청년이 죽어간 인천 땅 진흙 밭에
너를 묻고 온 지 스무 날
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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