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가

달. 포도. 잎사귀............장 만영

바보처럼1 2006. 8. 2. 00:45

<달.포도. 잎사귀>

 

순이 벌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동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시건설>창간호(1936.12) 수록

이 시는 동양화적이며 객관적이며 관조적이다.

사물에 대한 감각미와 화화적요소를 신선하게 살리고 있다.

*주제는 감각을 통해 본 밤 뜰의 서경.

 

 

<조그만 동네>

 

비석가게의

돌 쪼는 징소리

그 쇠붙이 소리 한 귀로 들으며

언덕배기에 올라서면

경희궁 옛 터 늙은 아카시아들이

짙은 꽃내를 뿌리며

저만치 웃음짓는다.

 

무너진 성줄기 따라

국립 관상대로 가는 하이얀 길이

앞으로 직선을 치며

쭉 뻗어 나가고

그 아래로는 옹기종기 들앉은

고만고만한 초라한 집들이

생활의 가냘픈 등불을 지키고 있다.

 

밤이 깊으면

여우 우는 소리

부엉새 소쩍새 우는 소리

간간히 들려오고

다니는 사람마저 드문

골목은 호젓해

인왕산 호랑이 새끼라도 내려와

두리번거릴 것만 같다.

 

도심 지대 가까이 위치하고도

먼 두메인 양 적적한

이 조그만 동네

여길 나는 좀체로 떠날 수가 없다.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무 욕심도 부리도 없이 소박하게 꾸며진 작품

회고적-회화적-모더니즘적인 작품

*주제는 잃어가는 전원에의 향수

*장 만영의 시세계

 장 만영은 김 광균과 더불어 모더니즘 계열의시인이다.그 러나 김 광균이 ㄷ시적이며 문명적인 반면, 장 만영은 그 소재를 농촌과 전원에서 택했다.

목가적이며 저원적이라는 면에서 신 석정과 통하나,장 만영은 신 석정보다 더 이미지의 조형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비>

 

순이 뒷산에 두견이 노래하는 사월달이면

비는 새파아란 잔디를 밟으며 온다.

 

비는 눈이 수정처럼 맑다.

비는 하이얀 진주 목걸이를 자랑한다.

 

비는 수양버들 그늘에서

한 종일 은빛 레이스를 짜고 있다.

 

비는 대낮에도 나를 키스한다.

비는 입술이 함씬 딸기물에 젖었다..

 

비는 고요한 노래를 불러

벚꽃 향기 풍기는 황혼을 데려온다.

 

비는 어디서 자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순이 우리가 촛불을 밝히고 마주 앉을 때

 

비는 밤 깊도록 창 밖에서 종알거라다가ㅏ

이윽고 아침이면 어디론지 가고 보이지 않는다.

 

*비가 흔히 어두운 느낌을 주는 반면, 이 시의 비는 한결 선명한 눈으로 내다본 밝은 비젼을 그린 내용의 시이다.

즉, 이 시에 깃들인 밝은 감성이 우리 마음을 한결 명랑하게 해 주는 것이다.

 

 

<비의 image>

 

병든 하늘이 찬 비를 뿌려.....

장미 가지 부러지고

가슴에 그리던

아름다운 무지개마저 사라졌다.

 

나의 '소년'은 어디로 갔느뇨, 비애를 지닌 채로.

 

이 오늘 밤은

창을 치는 빗소리가

나의 동해(童骸)를 넣은 검은 관에

못을 박는 쇠망치 소리로

그렇게 자꾸 들린다..... .

 

마음아, 너는 상복을 입고

쓸쓸히, 진정 쓸쓸히 누워 있을

그 어느 바닷가의 무덤이나 찾아 가렴.

 

*조광 25호 (1940.2) 수록

비이 이미지를 무척 퇴폐적이고 비관스러운 주관으로 노래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순수에의 동경이 비애의 안쪽에 스며있다.

*주제는 순수에의 동경

 

 

<소쩍새>

 

소쩍새들이 운다.

소쩍소쩍 솥이 작다고

뒷산에서도

앞산에서도

소쩍새들이 울고 있다.

 

소쩍새가

저렇게 많이 나오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어머니가 나에게 일러 주시는 그 사이에도

소쩍소쩍 솥이 작다고

소쩍새들은 목이 닳도록 울어 댄다.

 

밤이 깊도록 울어 댄다.

아아, 마을은

소쩍새 투성이다.

 

*소재갸 된 것은 전원의 소쩍새의 울음소리

청각적 이미지를 최대한으로 살려 한국적인 애조를 노래하고 있다.

*주제는 풍년이 들기를 염원함

*소쩍새: 두견새-자규새-귀촉도-망제혼- 불여귀 등 수많은 이명(異名)이 있음

 

 

<길 손>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

한 권으 조이스 시집과

한 자루의 외국제 노란 연필과

때 묻은 몇 권의 노트와

무수한 담배 꽁초와

덧없는 마음을 그대로

낡은 다락방에 남겨 놓고

저녁놀 스러지듯이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

 

날마다 떼지어 날아와 우는

검은 새들의 시끄러운

지저귐 속에서

슬픈 세월 속에서

아름다운 장미의 시

한 편 쓰지 못한 채

그리운 벗들에게 문안편지

한 장도 내지 못한 채

벽에 걸린 밀레의

풍경화만 바라보며 지내던

길손이 이제 떠나려 하고 있다.

 

산등 너머로 사라진

머리치네 쓴 그 아낙네처럼

떠나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영겁의 외로운 길손

붙들 수 조차 없는 길손과의

석별을 서러워 마라.

 

닦아 놓은

회상의 은촛대에

오색 촛불 가지런히

꽃처럼 밝히고

아무 말 아무 생각하지 말고

차가운 밤하늘로 퍼지는

먼 산사의 재야의 종소리 들으며

하룻밤을 뜬 채 새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