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 입(滅入)>
한 개 돌 속에
하루가 소리없이 저물어 가듯이
그렇게 옮기어 가는
정연한 움직임 속에서
소조한 시야에 들어오는
미루나무의 나상(裸像)
모여드는 원경을 흔들어 줄
바람도 없이
이루어 온 많은 빛깔과 보람과
모두 다 가라앉은 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면
끝 가지 아슬히 사라져
하늘이 된다.
*늦가을의 적막한 광경을 통해 인간의 멸적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제는 적막과 공허함,
<가을에>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처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읍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라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친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시집 '여맥을 위한 시정'(1959) 수록
생명에의 신뢰를 노래한 주지적인 서정시. 기도의 자세로 노래하고 있다.
1~2연: 기도의 자세
3연: 생명에의 신뢰(주제연)
4~5연: 진리를 지키기 위한 기도
<눈보라 속에서>
그 풍요한 계절의 편력에서
너는 돌아왔구나.
가을과 여름과 봄
장려(壯麗)하던 하늘빛
이제 자랑스런 보람 이루어
하늘과 땅 사이 가득히
축제으 코오러스처럼 쏟아지는 것이냐.
기다리던 날이 날마다
어제도 남겨 놓은 피곤한 가슴 속
무수히 뚫린 허망한 벌집마다
네 순박한 제온 포근히 자리하면
잃었던 빛깔 내게로 돌아와 환히 밝다.
스쳐 가는 사람마다 이웃 같은데
떠나간 너도 돌아오는가
허무 위에 쌓이는 가상(假像)일지라도
잠깐 타오르는 불길일지라도---
기쁨처럼 밝아오는 내 가슴에
이제야 돌아오는 즐거움으로
달려오는, 숨 막히도록 마구 달려 오는
너를
여기 눈보라 속 오연(傲然)히 서서
달려와 안길 너를 기다리게 하여 다오.
<나비의 여행>
----아가의 방. 5----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다가
깜깜한 절벽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치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阿鼻叫喚)하는 화약 냄새 소용돌이
전쟁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 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사상계>((1965.11)에 발표.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아가의 꿈 밖에 있는 존재이다.이 시는 인간애의 출발점을 순결 무구한 어린 생명인 '아가'로 선택하여 아가에 대한 어른들의 진실된 사랑을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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