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모악산 자락에 터전 화가 이철량씨

바보처럼1 2007. 7. 10. 22:36
 
[전원속의 작가들]모악산 자락에 터전 화가 이철량 씨
풀물 묻어난 손끝으로 자연을 붓질
 이철량씨는 모든 존재는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신념에서 미물인 풀벌레에조차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만물에 충만한 생명의식을 은유하고 있다.
텃밭의 푸성귀 뜯고 뒷산 길섶에서 나물 한 소쿠리 캔 작가가 길을 내려오고 있다. 반갑다고 불쑥 내민 손끝에 풀물이 묻어난다. 상추 미나리 아욱에 쑥 고사리 취나물 등 풋풋한 냄새가 상큼하다. 작가는 오늘 아침도 ‘풀’을 반찬 삼았다. 15년 전 전주 모악산 자락에 깃들인 이래로 화가 이철량(52)은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풀’을 주된 먹거리로 삼았다. 아침저녁 텃밭을 가꾸고 산에 올라 나물을 채취해 먹으니 ‘웰빙’이 따로 없다.

“풀꽃, 벌레 소리 등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것들의 소중함이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게 된 것이 전원 생활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인 것 같습니다. 미물도 가까이서 보고 만지면 사랑스러워지게 되는가 봅니다.” 앞산 고덕산에 해가 뜨면 일과를 시작해 뒷산 모악산에 해가 지면 하루를 접는 작가는 그렇게 자연에 순응해 살아간다.

작가가 붓질을 잠시 멈추고 2층 작업실 창문 너머로 물끄러미 구이저수지를 내려다본다. 오늘따라 짙은 물안개가 피어오르니 중국 구이린 산수가 부럽지 않다. 전주 시내에서 차로 20분 거리인 데다 풍광이 좋아 주변엔 예술인들이 많이 모여 산다. 작곡가 지성호, 무용가 손윤숙, 화가 유휴열을 비롯해 하동으로 이사간 시인 박남준도 한땐 이웃이었다. 대자연의 품속에서 세속적 욕망으로 얼룩진 삶의 허상들을 걸러내며 원초적 생명력을 회복하기엔 제격이다.

작가는 이곳에서 신시(神市)를 꿈꾼다. 아름다운 자연, 생명과 사랑이 충만한 세상이다. 나무와 새가 하나이고, 사람과 나무가 하나인 세상.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에 활동을 시작하고 모든 자연이 호흡하고 노래하며 생명의 운동을 함께하는 곳이다. 개미가 하루 일을 시작하면 인간도 일터로 나서는 그런 곳 말이다. 어둠은 쉼터요 자연과 함께 누울 자리를 편다. 잃어버린 인간의 근원적 고향인 낙원을 재현해 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간절한 소망과 구원의 언어로 낙원의 복원을 꿈꾸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자기 자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자연엔 상처만 되고 이웃에도 질투만이 존재합니다. 그림으로 새로운 고향을 제시하는 일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는 흐르는 물처럼 큰 표정이 없으면서 넉넉한 언어들을 쏟아낸다.

현대적 조형 산수와 도시풍경, 인물을 그렸던 작가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화면에 인물과 자연풍경을 혼합해 펼쳐 보였다. 특히 모악산에 작업실을 마련한 후엔 바람의 속삭임에 화답하는 풀과 나뭇잎을 많이 그렸다. 최근엔 인체와 자연의 어우러짐에 집중하고 있다. 인체의 기운찬 역동성이 자연을 닮았기 때문이다. 인체를 운동감으로 해체하는 것도 생명력을 포착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기본적인 관심은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자연성(천연성, 생명력)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인체는 살아 있음(생명)의 표정이 그 어느 것보다 섬세하지요.” 바람에 살랑거리는 풀잎의 움직임과 나무의 표정에서도, 그리고 인간 근육미에서도 생명을 읽어내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그는 모필의 나긋나긋함이 생명의 기운을 표현하기엔 안성맞춤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작업실을 나서 산을 오른다. 정상에 오르겠다는 목표도 없다. 그저 어슬렁거림이 전부다. 삼림욕을 하듯 자연의 기운을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그림은 그것을 붓 가는 대로 무의식적으로 풀어내는 과정이다. “좋은 그림은 생활에서 저절로 우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익숙하고 이해하기 쉬운 것이 좋은 그림은 아니지요.”

동행한 아내 안명자씨(49)씨는 “남편 그림이 처음엔 낮설고 이해하기 어려웠다”며 10년 정도 지나니 그제서야 편하고 너무 좋아졌다고 털어놓는다. 어렵던 신혼 시절 이웃에 병풍 그림을 팔면서 그 몇십 배 하는 장롱 값을 자랑하며 남편의 귀한 그림을 싸구려 취급했을 때 가슴이 아파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을 안씨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전주여고 강당이 헐릴 때 대들보 등 목재와 흙벽돌을 그대로 가져다 지은 80평 규모의 웅장한 작가의 작업실 옆에 굳이 아내 안씨가 자신의 작은 작업실을 마련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남편이 돈에 얽매이지 않고 그리고 싶은 걸 마음껏 그리게 해주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어요. 말수는 별로 없어도 좋은 것만 보고 말하려 하고, 늘 감사함을 깊게 넣고 사는 사람이지요.”

손맛이 좋아 늘 주변에 음식을 만들어 주기를 좋아했던 안씨가 주문김치 작업실을 마련해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마을이름을 따 상표도 신뱅이김치로 했다. 입소문으로 알려져 5년 만에 전국에 단골이 생겼을 정도.

“굳이 돈을 벌겠다기보다도 남편으로 하여금 좋는 작업에만 매진하라는 무언의 압력”이라며 웃는다. 한석봉 어머니의 떡을 써는 심정이랄까.

저녁시간 오랜만에 부부는 전주비빔밥으로 유명한 전북도청 옆 한정식집인 ‘가족회관’에 마주앉았다. 주인 김년임 여사가 손수 만든 호두강정을 특별히 내주며 “어서 돈 많이 벌어 식당에 이철량 선생 그림을 사서 걸어야 될 텐데”라며 반긴다.

식사 중에도 부부는 연인처럼 도란도란 이야기가 끝이 없다. 부부는 말한다. 그림의 멋과 김치의 맛에 자웅을 겨뤄보자고. 말없이 웃는 남편의 얼굴 위로 아내의 사랑스런 눈빛이 꽂힌다. 작가가 “오늘 밥값은 사장님이 쏘시지요”라며 아내에게 말한다. 평범한 말들이 오가는 풍경이 정겨운 한 폭의 그림이다.

전주=편완식기자/wansik@segye.com

<연보>

▲1952년 전북 순창 출생 ▲1974년 홍익대 동양화과 졸업 ▲1979년 홍익대 대학원 졸업(동양화 전공) ▲80년대 수묵화운동 적극 참여 ▲국립현대미술관, 성곡미술관 등 작품 소장 ▲전북대 예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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