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원주 치악산 자락서 사는 목사시인 고진하

바보처럼1 2007. 7. 10. 23:09
[전원속의 작가들]원주 치악산 자락서 사는목사시인 고진하
현실을 떠난 문학·종교란어차피 가짜 아닐까요?
난 일상을 聖化하고파
고진하(51) 시인은 원주 치악산 자락에 산다. 그는 집에서 10분 거리의 치악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치악산의 옛 이름 ‘모월산’을 따서 별호를 ‘모월산인’이라 자처할 만큼 산을 좋아한다.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한 그는 시집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 ‘프란체스코의 새들’ ‘우주배꼽’ ‘얼음수도원’ 등 네 권의 시집을 펴냈고, 김달진문학상도 수상했다.

시단에서 그는 맑은 이미지의 시로 독특한 위상을 확보한 중견시인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그는 시인이기 이전에 목사이기도 하다.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강원도 홍천과 강릉에서 10여년 동안 목회활동을 벌였고, 지금은 자유롭고 싶어서 1주일에 한 번만 춘천의 교회에 나가 설교목사로 활동하는 중이다. 설교의 대가는 교통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는 오로지 글만 써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전업시인인 셈인데, 시 고료만으로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많은 동화를 번역하고 산문집도 여러 권 펴냈다. 지난달에는 단상집 ‘꿈꾸는 돌‘을 펴냈고, 이번 달에도 산문집 한 권이 더 나올 예정이다.

원주시 단구동 그의 집 안방에 마주앉았을 때, 그는 원주 인근 폐교에 터 잡고 칠기공예를 하는 친구에게 들렀다가 따온 토종 오디로 담근 과일주를 내왔다. 검붉은 빛깔이 레드와인 같다. 달콤한 소주 맛이 난다.

“초기에는 시인과 목사의 삶을 병행하는 일이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문학이란 정신적인 자유로움이 생명인데 종교의 틀에 얽매이다 보면 내 문학에 틈이 생기는 것 아닌지 늘 불안했지요. 두 번째 시집을 낼 때까지는 시의 리듬이 흐트러질까봐 산문도 쓰지 않았습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도 메모만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종교와 문학이 서로 균형을 잡아주는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근원적인 깊이를 추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거칠지만, 문학은 종교에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 진리를 매개하는 섬세한 수단이지요.”

시인은 검은테 안경 속 맑은 눈동자로 종교와 문학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아내 권포근(45)씨는 요즈음 요가에 빠져 국제요가지도자협회의 자격증까지 따내기 위해 훈련에 열심인데, 고진하 시인도 ‘크리스천요가’를 펴내기 위해 인도철학과 기독교와의 연관관계 탐색에 시간을 할애하는 중이다. 요컨대 그는 유일신을 섬기는 배타적인 종교관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셈이다.

강원도 영월 태생인 고진하는 주천농고 시절까지만 해도 시는 구경도 하지 못했다.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해서 딱딱한 신학 공부만 하다 보니 시나 소설이 그리웠다. 한신대에 다니던 고정희씨가 시인으로 데뷔하는 것을 보고 감신대 축제 때 그녀를 파트너로 초청해 본격적으로 시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기 시작했고, 대학 문예공모에 시가 당선돼 습작의 길로 나섰다. 이후 10여년간 좌절과 절망의 자맥질을 계속하다가 결국 시인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대학 졸업 후 제주도에 가서 잠시 목회 활동을 하다가 상경 후 ‘기독교사상’을 편집하던 중 필화사건으로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당한 뒤 강제 해직됐다.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목회 활동을 하다가 첫 시집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를 펴냈다.

정서적으로 어두웠던 시절의 기록이다. 노인들과 개만 사는 외진 농촌 골짜기에서의 삶은 에너지가 결핍된 환경이었다. 당시 ‘빈 들’을 바라보면서 충만한 신성을 느끼기도 했다. 종교적 체험과 소외된 농촌의 삶에 대한 정서적 서술이 그대로 시가 되었다. 제주 시절 만난 부인과 가족을 이루어 살았는데 한 달에 쌀 한 말과 월급 4만원이 전부였던 가난한 삶이었다. 홍천에서 5년여 목회 생활을 마친 뒤 강릉으로 가서 사천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살았다. 이 시기에 두 번째 시집 ‘프란체스코의 새들’이 나왔다. 지루한 농촌 얘기에서 한걸음 나아가 박제화·기계화된 도시의 황폐한 삶을 시집에 담아냈다.

세 번째 시집 ‘우주 배꼽’에는 강릉에서의 삶을 오롯이 담아냈다. 그는 이때부터 왜 시인은 어둡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이들의 입장에만 서야 하는지 회의하기 시작했다. 하느님이 생명을 준 것은 즐겁고 명랑하게 살라는 것 아닌지, 서 있는 자리를 긍정하면서 아프면 아픈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닌지 자각한 것이다. 이때부터 시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역사와 현실만 보지 않고 우주적 현실, 내면의 우주까지 포함한 그 대상에 시적 진실을 투여한 것이다. 이 시절 그는 대관령과 강릉 바다가 동시에 보이는 풍광 좋은 교회에서 살면서 자연 속에서 신성을 느꼈다. 교회 뒷산의 소나무들이 죽어가던 여름에 그는 그 나무들을 붙잡고 기도를 드렸다. 신기하게도 초가을에 그 나무들이 살아났다. 그는 농담 삼아 아내에게 “여보, 내 기도발 세지?”라고 말했다.

“나이 먹으면서 작은 풀꽃들이 너무 예뻐 보입니다. 그 작은 풀에도 하느님이 살아 계신 것을 알겠어요. 나는 범신론 쪽에 가깝습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을 틀에 가두고 싶지 않아요. 하느님이 그물에 갇히는 쏘가리 같은 물고기입니까? 대자연 속에서 가슴으로 체험한 하느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인간이 만든 굴레나 틀보다는 원초적인 것에 가 닿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가 강릉에서의 목회 활동을 접고 원주로 온 것은 5년 전이다. 매인 삶에서 벗어나 원없이 문학에 투신하고 싶은 열망이 가장 크게 작동했다. 서울살이는 싫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살자니 경제 활동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아서 고향과 서울에서 가까운 원주를 선택했다. 이곳에 와서 펴낸 네 번째 시집이 ‘얼음 수도원’이다. 우주적 상상력에다 종교의 벽을 허무는 다원적 종교관을 결합시킨 내용으로 채워졌다.

“두꺼운 방한복을 뒤집어쓰고/ 스키를 질질 끌며 그곳에 가도/ 내가 머물 영혼의 의자는 없겠다.// 잔디 한 뿌리 자랄 수 없는 빙원이니/ 내 죄의식과 불안을 자라나게 할/ 고해소도 없겠다.// 고해소가 있다 한들/ 그곳을 찾아가다가/ 입이 얼어붙어 죄를 고백할 수도 없겠다.// 무슨 경전이라곤 씌어진 적이 없는 곳,/ 죄도 은총도 서식할 수 없는 곳,/ 신의 지문(指紋)이라면/ 얼음계곡에 묻힌 오랜 물고기의 뼈다귀들뿐이겠다.”

그는 남극에도 수도원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고해소를 찾아가다가 수염도 입도 얼어붙고, 죄마저 얼어붙어 남은 것은 하얀 얼음뿐인 곳. 부처도 예수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그 땅에 예수와 부처를 조각하면 그조차 결국 녹아 없어질 것이기에, 부처도 예수도 영원하지 않을 그 땅에 종교적 진리를 대입한 것이다. 토종 오디의 진액이 담긴 검붉은 술잔을 내려놓고, 단구동 시인의 집을 나와 근처 토지문학공원으로 나섰다. 박경리씨가 ‘토지’를 집필하던 집 주변을 공원으로 꾸며놓은 곳이다. 잡풀이 무성한 공원의 나무 계단에 앉아 시인은 소설가의 빈집을 바라보며 말했다.

“밥 먹고 배설하고 살 비비는 현실을 떠난 문학이나 종교란, 어차피 가짜 아닌가요? 앞으로 내 시는 일상적인 삶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쪽으로 가볼 생각입니다. 일상의 성화(聖化)를 위해서.”

원주=글·사진 조용호기자/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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