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군 천태산 영국사 뒷방. 두 평짜리 쪽방 앞으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배음으로 시인은 지난 5년 동안의 외로움에 대해 얘기하는 중이다. 유난히 가슴에 습기가 많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체질이 있는데 양문규(44) 시인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경우일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울어서 모친이 매미 허물을 삶아서 먹인 적도 있다고 하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지도 모르겠다. 5년 전, 바쁘게 뛰어다니던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그는 스스로 고향 땅에 유배되었다. 고향 인근 천태산 영국사에서 불사(佛事)를 벌일 때 인부들 숙소로 쓰던 판잣집 방에 들었다. 이후 주지 스님과 함께 대나무들을 베어 잘라, 겉모습이 흉한 판잣집 외벽에 붙여 거처를 대나무집으로 바꾸었다. 그는 영동읍에서 한참을 나와 도로변에서도 비좁은 산길을 힘겹게 올라가야 당도하는 천태산 영국사 대나무집에 틀어박혀, 눈과 비와 꽃과 은행나무에 마음을 비끄러매고 살아온 것이다. 1989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 출범할 무렵 신경림 시인이 그를 불러 올려 민예총 실무를 맡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서울살이가 시작됐다. 청주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1년 간 서울에서 잡지기자로 살았지만 적응을 못하고 낙향했던 터였다. 같은 해 ‘한국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데뷔한 뒤 1991년 첫 시집 ‘벙어리 연가’를 펴낸 그였지만, 이후로는 자신의 시를 위해서 살지 못했다. 그의 일이란 대부분 전면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일이라기보다는 뒷전에서 생색은 나지 않지만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는 역할이었다. 외로운 문인들의 술벗이 되어주고 행사 실무를 맡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삶이었다. 한번은 고은 시인이 그를 두고 여러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너의 에너지는 내 삼십대와 비슷하다”며 “제발 너 자신을 위해 좀 살아라”고 충고한 적도 있었다. 민예총에서 5년간 복무한 뒤 그는 실천문학사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도 그에게는 일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IMF 국면에서 어려운 출판사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그는 그러나 결국 구조조정의 명목으로 1999년 퇴출당했다. 전후관계와 속사정이야 그 자신만이 알겠지만,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사람 관계와 각박한 서울살이에 심각한 내상을 입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유배의 길을 떠났다. 10여년 동안 살던 경기도 화정을 떠나며 그는 이런 시를 남겼다. “집을 비운다/ 모든 것이 일순간// 솟구치고 솟구치는 검붉은 피/ 땅속 깊이 스며// 옛 생각 껴안고/ 나지막하게 엎드려 울 때/ 저 밖의 바람// 꽃나무의 비애 외면하고/ 화정을 떠난다.”(‘花井을 떠나며’ 부분) 이 시에도 울음이 나오거니와 양문규에게 ‘운다는 것’은 태생의 인연인 듯하다. 인삼농사를 짓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 영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양문규는 인근 대처인 대전으로 초등학교 6학년 때 유학을 갔는데, 적응을 못하고 하도 울어대는 바람에 ‘애 버리겠다’고 담임과 부모가 합의해 다시 영동으로 돌아왔다. 고등학교 입시가 엄혹하던 그 시절, 부모는 자식의 장래를 위해 다시 중학교 때 대전으로 보냈지만 마찬가지로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한 아들의 울음 속 타향살이를 청산시켰다. 이 정 많고 외로움 많이 타는 소년은 고교시절 문학반에 드나들면서 드디어 그 외로움의 극복방안을 찾아냈다. 외로워서 죽어버릴 것 같은 심정도 시를 쓰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시를 쓰면, 이 세상이 아무리 외로워도 제대로 살아낼 것 같은 자족감이 들었다. 그 길이 지금까지 업이 되어 버렸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술집과 술판 사이에서, 일과 일 사이에서 정신없이 살던 리듬을 자의반 타의반 하루아침에 뚝 끊어내고 깊은 산 속 영국사 뒷방에 스스로를 가두었을 때, 울음 많은 사내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터이다. 영국사에 사는 수령이 천년이 넘은 은행나무도 울었다.
그가 영국사에서 5년 동안 울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동안 그는 ‘백석 시 연구―시창작방법론을 중심으로’라는 박사학위논문을 써서 명지대 문예창작과 1호 박사가 됐다. 뿐만 아니라 첫 시집 이후 11년만에 두번째 시집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2002년)도 펴냈고, 한남대와 명지대에 강의까지 나가는 세월을 시작했으니 기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생산적인 5년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전역에 마중 나온 시인을 만나 영국사에 가기 전에 그의 지인들과 함께 먼저 금강 상류 어죽집에 들렀다. 바깥 하늘은 시커멓게 뭉개지면서 소나기가 내릴 태세인데 어죽 끓는 냄새 속에 사람들의 표정은 평온하고 따스했다. 금강에서 잡아올린 ‘도리뱅뱅이’가 뜨거운 철판 위에서 몸을 뒤치기 시작할 때 시인은 영동의 감나무에 대해 말했다. 영동은 가로수조차 감나무인데, 감나무잎에 드는 단풍이야말로 시인 김남주가 말했듯이 ‘조선의 마음’이라고. 가장 늦게까지 스며들 듯이 깊이 물 드는 감나무 잎의 단풍은 말할 것도 없고, 봄에 피는 감꽃은 다디달아서 늘 주워먹고 목걸이를 만들며, 마지막 남은 감은 까치에게 주는 조선의 마음을 오롯이 담은 감나무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고 자랑했다. 때가 되면 다시 서울로 올라갈 것이냐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요즘은 대학 강의 나가랴 여기저기 원고 써대랴 외로울 틈도 없습니다. 서울은 절대 올라가고 싶지 않아요. 가능하면 고향에 정착해 살면서 영국사 일대를 물봉선 구절초들이 난만한 생태공원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영국사를 다녀와 대전 역에서 다시 서울 가는 기차를 탈 때는 새벽이었다. 영화에서만 새벽 대기가 푸르스름한 줄 알았는데 실제로 대전역 광장 새벽은 푸른 빛으로 가득했다. 비 내리는 대전 역에서 시인은 환하게 웃으며 배웅했다. 하지만 환하게 웃는 눈자위 옆으로 배어나던 물기가 이별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습기 많은 시인의 눈물인지, 빗물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이 세상의 가벼운 눈물 한 방울/ 눈을 맞춘다/ 눈이 길의 눈 속으로 들어간다/ 끊임없이,/ 추억의 오랜 울음을 감싸안고/ 그 속을 내가 간다”(‘눈길’ 부분)
영동=글·사진 조용호기자/jhoy@segye.com |
2004.09.20 (월) 17: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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