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의 책꽂이

(10) 벽산 김재우 사장

바보처럼1 2007. 7. 24. 12:38
【CEO책꽂이】벽산⑩김재우 사장 "새벽독서"
새벽 4시 반 독서로 하루를 연다
세계일보교보문고-북코스모스공동기획 시리즈
한국 기업을 주름잡는 경영자들은 대부분 ‘아침형 인간’이다. 이들은 남들이 곤히 단잠에 빠져 있을 때 각종 업무를 챙기면서 먼저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성공의 범주에 이름을 올려놓은 기업이나 경제인치고 역경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은 드물다.

아침형 인간=독서경영의 모범 사례로 잘 알려진 주식회사 벽산의 김재우 사장도 철저한 아침형 인간으로 역경을 기회로 만들어 온 경영자이다. 김 사장은 매일 새벽 4시 반 기상과 동시에 팽팽한 긴장감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미래를 읽으려면 남들의 뒤를 따라가서는 안 되며, 더구나 아침 시간은 그에게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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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자마자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명상을 합니다. 그런 다음 한 시간 정도 운동하고 책을 봅니다. 전날 자정을 넘기며 술을 마시는 경우도 있지만 기상 시간은 동일합니다.”

외환위기에 휘청거리던 벽산이 김 사장에게 기업 경영을 의뢰한 것은 1998년 1월로, 그가 30년 동안 몸담은 삼성을 떠나 잠시 외국에 체류할 때였다. 어려운 자리라고 여겼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제의를 수용했다.

“선택의 연속인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선택 이후에 펼쳐지는 인생의 모습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벽산의 제의를 받아들인 시기가 캐나다의 한 대학에 머물면서 책도 읽고 가끔 강연도 하며 재미있게 보내던 때였지요. ‘역경은 나의 힘이다’라는 신념으로 어려운 기업에 들어가 힘껏 일해보고 싶었습니다.”

책은 조직문화 형성의 최고 도구=그러나 미래의 희망이 줄어들던 업체에 들어가 힘차게 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회사가 어려움에 처해 직원들에게 위기 탈출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기는 더욱 어려웠다. 외환위기의 구원투수가 된 그는 구성원들과의 융화가 제일 중요하다고 여겼다. 구성원들이 공감하는 조직문화를 만드는 데는 책보다 좋은 도구는 없다고 생각했다.

1999년에 ‘인듀어런스’(뜨인돌출판사)를 읽고 김 사장은 무릎을 쳤다. 1914년 8월 세계 최초로 남극대륙 횡단에 나섰던 인듀어런스호의 선장 어니스트 섀클턴과 대원 27명의 이야기는 젊은 사원들에게 감동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남극 탐험에 나섰다가 죽는 게 나을 정도의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26개월 만에 생환에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는 낙담하고 있던 직원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실패한 탐험가의 성공한 지도력’이 담긴 이 책은 ‘실패가 위대한 실패’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상상을 초월하는 역경에 맞섰던 섀클턴 선장과 대원들의 이야기가 사원들에게 현재의 역경을 탈출할 수 있겠다는 희망과 원동력을 제공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충성심이란 ‘리더가 부하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하 스스로 보이는 것’이라는 사실도 직원들이 깨달았다. “길고도 험했던 여정의 마지막 단계인 얼음 산을 넘을 때, 일행은 분명 3명인데 4명처럼 느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선장과 그 부하들이 그렇게 느꼈다는 구절을 보고 뭉클해졌습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내내 구성원들이 함께 동행했다는 것만큼 감동을 자아내는 것은 없습니다.”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가 역경에 빠져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섀클턴의 리더십을 달라고 기도했고, 주간지 타임에 서양의 CEO들이 그의 모험담을 최고의 리더십 교본으로 삼는다고 보도되는 등 서구에서는 섀클턴의 리더십이 화두가 돼 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아직도 섀클턴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들이 많은 현실을 감안할 때 그를 통해 사원들의 용기를 자극한 김 사장이 바로 선구자요 탐험가로 보였다.

그러나 섀클턴에게만 신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 사장에게도 다양한 ‘신화’가 있다. 삼성맨으로 30년 가까이 보낸 때문인지 그의 이야기는 현재의 직장에서보다 오히려 삼성에서 전설처럼 전해진다. 김 사장은 삼성물산의 레바논 베이루트 지사장이었던 1975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억1000만달러짜리 군납 계약을 무턱대고 체결했다. 10년 주기로 군복의 재질과 디자인을 바꿨기 때문에 국내에는 군납시장 자체가 없었던 때이고 보면 무모하기까지 한 계약이었다. “당시 중동에서는 삼성은 고사하고 한국이라는 나라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출만이 제1의 길이라 여기고 그들을 설득해 수출 활로를 개척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1년 수출 총액이 40억달러에 불과하고 삼성물산의 1년 수출액이 2억달러에 못 미쳤던 때이므로 젊은 상사원의 수출액으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였다. 벽산의 김건주 건설담당 상무는 “김 사장이 해외 출장이라도 가면 현지 삼성 주재원들이 이 신화의 인물을 보기 위해서 투숙 호텔에 나타나는 경우가 잦을 정도”라고 전했다.

전 직원이 책을 읽는다=‘인듀어런스’의 경험을 통해 독서경영이 회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신념을 갖게 된 그는 요즘도 매월 한 권의 책을 선정해 200명의 사무직 직원들에게 선물하고 있다. 1999년부터 시작해 직원들이 벌써 70종이 넘는 책을 함께 읽어왔다.

“회사 경영은 상사와 직원의 끊임없는 대화로 이뤄집니다. 대화라는 것은 일종의 마음 전달 방식인데 내 생각을 전달하고 상대방의 생각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만한 좋은 도구가 없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사색 없는 독서는 소화되지 않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고 했다.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김 사장도 특히 사무직 직원들에게 서류철만 들여다보지 말고 책을 읽고 행동하라고 주문한다. 사무직 직원은 새로운 것을 알기보다는 다시 한번 깨닫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이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는 재교육이 필요합니다. 인터넷 매체 등 다양한 교육 매체가 존재하지만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는 독서가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책이 위대한 것을 품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단순히 책의 지식만을 갖고는 발전을 이룰 수 없습니다. 책의 지혜를 활용하고 실천해야 개인과 기업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김 사장이 부임한 지 7년이 넘어가는 지금 벽산 직원들에게 책은 이제 도구가 아니라 목적이다. 초창기에 인듀어런스와 토드 사일러의 ‘천재처럼 생각하기’(한언) 등을 읽고 인터넷에 감상문을 올리면서 부담감을 느끼던 직원들이 이제는 거리낌없이 자신의 느낌을 밝히고 있다.

적어도 1년에 12권 이상 책을 읽는 벽산 직원들에게는 물론이고 김 사장에게 추천 책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 직원들에게도 보다 감동을 준 책은 있다. 김훈의 ‘칼의 노래’(생각의나무)와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열림원)를 통해 애국심과 인류애의 의미를 깨달았으며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김영사)와 ‘프로페셔널의 조건’(청림출판), ‘백만장자 코드’(삼진기획)를 통해 경제인의 마인드를 키웠다.

‘사람들이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고 삶을 바꾸려고 한다’고 안타까워하는 김 사장은 한 달 책값인 1만원 투자로 인생이 더 없이 즐겁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제안한다.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세종서적)에 나오는 구절은 꼭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내가 만들지 않은 인생은 없다. 행복한 이는 행복하기를, 불행한 이는 불행하기를 선택했을 뿐이다.”

글 박종현, 사진 이종렬 기자 bali@segye.com

그는 누구인가

수출 제1선에 섰다가 이제는 내수 시장을 본격 공략하고 있는 김 사장에게 아내와 책은 늘 든든한 동반자였다. 아내는 전쟁이 끊이지 않은 중동 지역을 말 없이 따라나섰고 아이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웠다. 어머니의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려 했다가 경영을 전공한 김 사장은 재즈에 빠져 음악을 전공하는 아들의 모습이 자랑스럽다. 진정한 음악가는 50살이 넘어야 가능할 것이라는 느긋한 생각으로 자식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교육 문제에서는 아내와 함께 초연하게 지켜보는 편이지만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면 곧장 읽는다.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따뜻하다. 그러나 그는 CEO를 꿈꾸는 젊은이들은 늘어가지만 진정으로 CEO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들은 드문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머리로만 무엇인가 되려고 꿈꿀 뿐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44년생인 김 사장은 삼성물산 특수사업본부장과 부사장 등을 지냈으며 1994년 삼성중공업 부사장을 끝으로 삼성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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