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천 년을 한 줄 구슬에 꿰어
오시는 길을 한 줄 구슬에 이어 드리겠읍니다.
하루가 천 년에 닿도록
길고 긴 사무침에 목이 메오면
오시는 길엔 장미가 피어 지지 않으오리다.
오시는 길엔 달빛도 그늘지지 않으오리.
먼 먼 나라의 사람처럼
당신은 이 마음의 방언(방언)을 왜 그리 몰라 들으십니까?
우러러 그리움이 꽃 피듯 피오면
그대는 저 오월강 위로 노를 저어 오시렵니까?
감추인 사랑이 석류알처럼 터지면
그대는 가만히 이 사라을 안으려나이까?
내 곁에 계신 당신이온데
어이 이리 멀고 먼 생각의 가지에서만
사랑은 방황하다 돌아서 버립니까?
*남몰래 안고 뒹굴수밖에 없는 사랑의 안타까움을 노래하였다.
*마음의 방언: 혼자서만 되풀이하는 안타까운 호소
*5월강: 말고 아름다움을 풍기는 어감
*사랑은 방황한다: 사랑을 이루지 못해 안타까워한다.
<이 생명을>
임이 부르시면 달려 가지요.
금띠로 장식한 치마가 없어도
진주로 꿰멘 목도리가 없어도
임이 오라시면 나는 가지요.
임이 살라시면 사오리다.
먹을 것 메말라 창고가 비었어도
빚덤이로 옘집 채찍을 맞으면서도
임이 살라시면 나는 살아요.
죽음으로 갚을 길이 있다면 죽지요.
빈 손으로 임의 앞을 지나다니요.
내 임의 원이라면 이 생명을 아끼오리.
이 심장의 온 피를 다 빼어 바치리다.
무엔들 사양하리, 무엔들 안 바치리.
창백한 수족에 힘 나실 일이라면
파리한 임의 손을 버리고 가다니요.
힘 잃은 그 무릎을 버리고 가다니요.
*시집<빛나는 지역(1933.10)수록
헌신적인 순애의 정신을 노래했다.
물질적인 조건을 초월하여 이념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정신이 표현되었다.
*주제는 임에 대한 순수한 애정
<묵 도>
나에게 시원한 물을 주든지
뜨거운 불꽃을 주셔요
덥지도 차지도 않은 이 울타리 속에서
어서 나를 처치해 주셔요
주여 나를 이 황혼 같은 빛깔에서 빼 내시와
캄캄한 저주를 내리시든지
광명한 복음을 주셔요
이 몸이 다아 시들기 저에 오오 주여
*주제는 인생 달관에 대한 기원
*시원한 물: 지성
*뜨거운 불꽃: 정열
*캄캄한 저주: 생에 대한 회의감
*광명한 복음: 생에 대한 관조
<어머니의 기도>
높이 잔물지는 나뭇가지에
어린 새가 엄마 찾아 날아들면,
어머니는 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산 위 조그만 성당 안에 촛불을 켠다.
바람이 성서를 날릴 때
그리로 들리는 병사의 발자국 소리들!
아들은 어느 산백을 지금 넘나 보다.
쌓인 눈길을 헤엄쳐
폭풍의 채찍을 맞으며
적의 땅에 달리고 있나 보다.
애달픈 어머니의 뜨거운 눈엔
피 흘리는 아들의 십자가가 보인다.
주여!
이기고 돌아오게 하옵소서.
이기고 돌아오게 하옵소러.
*시집,풍랑(1951)> 수록
전선에 나간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염원을 점층적 수법으로 노래한 일종의 애국시
*주제는 아들의 무운을 비는 어머니의 정성.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 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숲을
이 순신같이, 나폴레옹같이,시이저같이,
조국으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크바 크레믈린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이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시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주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에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나르는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 이슬 내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새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 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 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다.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가 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서백리아 먼 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는 강하다.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시집<풍랑>(1951) 수록
6.25동란에서 취재한 애국시.
조국의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던진 젊은 국군의 말을 통하여 애국심을 호소하고 있다.
*주제는 자유와 조국애
*구성은 전 12연으로 되었으나, 기(起 1연~3연)-서(敍 4연~11연)-결(結 12연)의 3분법으로 가를 수 있다.
<문을 여소서>
-화랑 무사(武士)를 생각하고
내 등불은 숲속 깊이 당신의 문전을 비췹니다.
밤바람이 일매 나 가슴은 초조하고
길은 나무 그림자로 흔들립니다.
임이여! 나의 사랑이여
영광의 잔이 놓인 당신의 초암(草庵)안에
영원한 승리의 아침이 올 때입니다.
일어나 파리한 이 여인의 병든 생명을 건지소서.
임이여! 월광에 번득이는 당신의 칼을
이 밤에 빌려 주사
녹스런 권태와 수면, 생명을 파 먹는 버러지를 소멸하소서.
이도 아니어든 원수의 간을 찌르는
오오 그 피 묻은 칼로 내 염통을 찔러
당신 앞에 엎더지게 하소서.
임이여! 늙은 횟바람이 세월을 흔듭니다.
가지마다 맺혔던 즐거움은 떨어지고
여울진 낙엽이 왼 뜰에 굴러 갑니다.
조국의 하숫가엔 물결 뛰는 소리도 없고
고단한 품꾼만이 건너 가고 건너 오고.
사막을 안고 가는 무리들이 하룻밤 산맥을 쓸어보다 가 버립니다.
임의 퉁소 소리로 근심스러운 장막을 흔들고
뜨거운 호흡으로 저 산 밑을 울리소소.
그리고 이 잔약한 여인에게 시간마다
육체를 단장하는 빈 생(生)을 주지 마소서.
임이여! 등불이 조을고 밤이 깊어도
당신의 음성을 기다려 서 있으리다.
내 비밀의 노래로 당신을 부르나 불순한 내 소리에
당신의 거룩한 귀는 깨지 못합니다.
회전(悔悛)의 뜨거운 눈물이 가슴을 적시우매
적은 미래를 당신 앞에 드립니다.
당신의 크신 부름을 기다리리다.
산짐승의 밥이 되어도 내 영광은 장하외다.
거리에 암흑이 왔읍니다.
임이여 등불이 다 하기 저 문을 열어 이 여인의 손을 잡아 주소서
*신동아(1939) 수록
일반적으로 영운 모 윤숙으 시에는 감정이나 정열이 앞서 있다. 때문에 견고한 언어를 선택하기에 앞서서 가슴 속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생각을 토로해 버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영운의 시는 같은 시대를 활약한 여류시인 노 천명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영운의 처녀 시집<빛나는 지역>은 1933년에 서울 창문사에서 발행하였는데 105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그리고 김 활란과 이 광수의 서문이 실려있다.
<나의 별>
밤마다 나의 창문 가에
밤 새워 깨어 있는 나의 별아
너와 나 사이 길은 멀고도 멀어
저녁이면 내미는 이 팔이
오늘 밤도 청문턱에 고달피 누웠다.
이 마음의 떠 있는 그 사람과 같이도
영원히 푸르러 있는 나의 별아
너와 나 사이 검은 공간은 꿈같이도 아득해
밤마다 헤엄치는 나의 나래는
오늘 밤도 내 자리에 피곤히 돌아왔다.
오 나의 별 나의 사랑하는 너
나는 너의 푸른 눈동자에 취하여
맑은 영혼의 강변에 잠들고 싶다
맘 아픈 인생의 허무한 잠꼬대를
너의 빛 아래서 산산히 깨쳐 보고 싶다.
이 마음의 그리움이 구슬로 피었다면
흩어진 설움의 이 내 곡조를
한 줄 두 줄 이어서 그 하늘에 매이런만
무궁한 창공 높고도 멀어
그리운 이 꿈은 깰 길도 없어라.
<샘가에 앉아>
자주빛으로 물든 피곤한 하늘 아래
잎잎이 늘어진 힘없는 나무 그늘
여름날 황혼은 나른한 혈관(血管) 밑으로 저물어 가노니
샘가에 앉아 고달픈 하루를 쉬는 몸
저녁 하늘에 떠도는 구름과도 같아라
맥빠진 나무숲에 저녁 새소리 요란하고
수줍은 월계 향기 담 너머로 흘러
해진 후 녹음 새엔 꿈 같은 추억이 스며드노니
샘가에 앉아 옛날을 헤아리는 몸
바다에 헤엄치는 마풀과도 같아라
연백색 구름 가로 휘도는 노을
파란 하늘 위에 이름 모를 화폭을 그려
잃었던 낭인(浪人)의 노래를 자아내나니
샘가에 앉아 노래 읊는 몸
야자수 그늘에 헤메는 집시와도 같아라
<밤 호수>
호수 밑 그윽한 곳
품은 꿈 알 길 없고
그 안에 지나는 세월의 움직임도
내 알 길 없네
오직 먼 세계에서 떠온 밤 별 하나
그 안에 안겨 흔들림 없노니
바람 지나고 티끌 모여도
호수 밑 비밀 모르리
아무도 못 듣는 그 곳
눈물어린 가슴 속같이
호수는 별 하나 안은 채 조용하다.
<하수(河水)로 간다>
고독은 드디어 언어를 잃고
깊은 숲에 잠들다
지나가는 바람도
흘러 내리는 달빛도
그 얼굴에 검은 침묵을 깃드릴 뿐
수많은 가지 새로
휘뿌리는 별빛도
이 밤엔 오직 한적하여
그리움은 마음에서 숨진다.
벼개에 지친 피곤
갈하여 타오를 제
스며 오는 물소리 물소리
멀고 기인 골짜기로
저 혼자 흘러 가는 물소리
눈 감으면 이 마음 고요한 품에
안기어 지나는 듯 가까운 그 소리
나는 문득 깨어
아무도 없는 하수로 간다.
가시덤불 어두운 숲으로
나는 달려 달려 새벽으로 간다.
물은 맑을지도 모르고
물은 흐린지도 모르고
나는 마음의 슬픈 장미를 살리려
물가로 달리노라, 아무도 모르게
*문장(1940)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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