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 들어가자면
불빛이 흘러 나오는 고가(古家)가 보였다.
거기--
버레 우는 가을이 있었다.
벌판에 눈 덮인 달밤도 있었다.
흰나리꽃이 향을 토하는 저녁
손길이 흰 사람들은
꽃술을 따 문 병풍의
사슴을 이야기했다.
솔밭사이로 솔밭사이로 걸어
지금도
전설처럼--
고가엔 불빛이 보이련만
숱한 이야기들이 생각날까봐
몸을 소스라침을
비둘기같이 순한 마음에서.....
*김 광섭의 평--"천명이 온 것은 흐르는 눈물이 아니고 잦아드는 눈물이었다. 그러므로 펀명은 정서를 범람시키지 않았다. 어디로 샐까 봐 뚝을 쌓으면서 구멍이 있을까 걱정하며 또 막았고, 이 소극성은 천명의 꿈에 절제를 주었다.
이 절제에서 오는 우아(優雅)까지도 마치 슬픔의 집에 깔린 연한 비단결 같아서,때로는 그 무늬를 찢고 실었으나 천명의 자유는 그렇지 못했다."
<푸른 오월>
청자(靑瓷)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 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正午)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 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 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씬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벋어 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 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시집<산호림>(1938.1) 수록
희망과 신록의 계절 5둴을 노래한 시이다.
작자가 느끼는 감정은 비애와 환희가 엇갈리는 서정이다.
*주제는 5월의 서정.
<황마차(幌馬車)>
기차가 허리띠만한 강에 걸린 다리를 넘는다.
여기서부터는 우리 땅이 아니란다.
아이들의 세간 놀음보다 더 싱겁구나.
황마차에 올라 앉아 아가위나 씹자.
카추사의 수건을 쓰고 달리고 싶구나.
나는 여기 말을 모르오.
호인(胡人)의 관이 널린 벌판을 마차는 달리오.
시가아도 피울 줄 모르고 휘파람도 못 불고..... .
*삼천리 문학창간호(1938.1)수록
만주 여행에서 소재를 구한 작품
*주제는 이국에서 느끼는 고독감
*황마차: 포장마차
*세간놀음: 소꼽장난
*호인: 만주 사람
<남사당(男寺黨)>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나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남성)이 십분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 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삼천리(1940.9)수록
남사당패를 따라다니는 소년의 비애를 통하여 방랑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시이다.
*남사당: 이곳 저곳 다니면서 소리나 춤을 파는 사내.("사당"은 노래와 춤을 파는 창녀)
*조라치: 왕실이나 나라에서 세운 절을 청소하는 머슴.
<사 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시집 산호림(1938)수록
사슴은 작자의 분신이다.
2연에서 시인의 나르시시즘의 모습을 표현하면서, 이상적 생명에의 향수를 노래하고 있다.
*주제는 세속과 타협할 수 없는 고고한 생의 자세.
<고 향>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엔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글레 산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뻐꾹새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 곰방대
곰취 참두릅 홋잎나물을
뜯는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망이 은방망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기를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는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서 온 반마(斑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메밀꽃이 하아얗게 피는 곳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티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인문평론(1940.6)수록
널리 알려져 애창되고 있는 시 고향을 그리는 정이 담담하게 그리고 면면하게 노래되고 있다.
<장 날>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와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여성(1939)수록
소재는 시골 장날
1연; 장을 보러 가는 풍경
2연: 장을 보고 오는 풍경
*주제는 옛 고향에 대한 추억
*돈사야: 팔아야(사투리)
*열하룻장: 매월 11일에 서는 장
<고 독>
변변치 못한 화를 받던 날
어린애처럼 울고 나서
고독을 사랑하는 버릇을 지었읍니다.
번잡이 이처럼 싱크러울 때
고독은 단하나의 친구라 할까요
그는 고요한 사색의 호숫가로
나를 달래 데리고 가
내 이지러진 얼굴을 비추어 줍니다.
고독은 오히려 사랑스러운 것
함부로 친할 수도 없는 것
아무나 가까이 하기도 어려운 것인가 봐요
<고 별>
어제 나에게 찬사와 꽃다발을 던지고
우뢰같은 박수를 보내주던 인사(인사)들
오늘은 멸시의 눈초리로 혹은 무심히
내 앞을 지나쳐 버린다.
청춘을 바친 이 땅
오늘 내 머리에는 용수가 씌워졌다.
고도에라도 좋으니 차라리 머언 곳으로
나를 보내다오.
뱃사공은 나와 방언이 달라도 좋다.
내가 떠나면
정든 책상은 고물상이 업어갈 것이고
아끼던 책들은 천덕꾼이가 되어 창터로 나갈게다.
나와 친하던 이들, 또 나를 시기하던 이들
잔을 들어라 그대들과 나 사이에
마지막인 작별의 잔을 높이 들자.
우정이라는 것, 또 신의라는 것,
이것은 다 어디 있는 것이냐
생쥐에게나 뜯어 먹에 던져 주어라.
온갖 화근이었던 이름 석 자를
갈기갈기 찢어서 바다에 던져버리련다.
나를 어디 떨어진 섬으로 멀리 멀리 보내 다오.
눈물 어린 얼굴을 돌이키고
나는 이곳을 떠나련다.
개 짖는 마을들아
닭이 새벽을 알리는 촌가(村家)들아
잘있거라.
별이 있고,
하늘이 있고
거기 자유가 닫혀지지 않는 곳이라면.
*6.25동란 당시 잠시 영어(囹圄)의 생활을 했을 때의 작품
현실에 대한 혐오감을 노래하고 있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노 천명에 대한 평가와 견해
현실과 운명에 타협하지 못하고 결혼까지 물리친 채 고독과 자학 속에서 다만 시직에만 정진했다.
영롱한 서정시로 예리한 감각과 청순한 정서로 애수적이면서도 넘치는 감정을 절약하고 있다.
가슴을 깎는 고독과 운명적인 자학이 여과(濾過)된.....찬 감각의 높은 시세계이다.
<별을 쳐다보며>
나무가 하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댓자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 본댓자
또 미운 놈을 혼내 주어 본다는 일
그까짓 것이 다아 무었입니까
술 한 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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