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아주 너를 떠나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펑펑 눈이 오는 밤이었다. 돌아서는 모통이마다 내 자욱 소리는 나를 따라오고 너는 내 중심에서 누의 것으로 환원하고 있었다.
너는 아주 떠나버렸기에 그러기에 고이 들을 수 있는 내 스스로의 자욱소리였지만 내가 남기고 온 발자욱은 이내 묻혀 갔으리라. 펑펑 내리는 눈이 감정 속에 묻혀 갔으리라.
너는 이미 나의 지평(地平)가로 떠나갔기에 그만이지만 그러나 너 대신 내가 떠나갔더래도 좋았을 게디ㅣ 우리는 누가 먼저 떠나든, 황막히 내리는 감정 속에 살아가는 것이냐.
*눈에 대한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어쩌면 격정적일 수도 있을 그 추억을 차분하게 노래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 감정이 고조되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리라.
< 목 숨 >
목숨은 때 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어라.
너랑 살아 보고 싶어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어라.
억만 광년의 현암(玄暗)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의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는 죽은 자를 증언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하라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한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할 수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는 살아서 돌아서라.
*전쟁을 치르고 나면 항상 죽은 사람이 가슴에 남아 있게 마련이고, 또한 목숨의 존귀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수법은 모더니즘.
*주제는 생명의 존재적 갈등과 그 의의의 추구.
<오 렌 지>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어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는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도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는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도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에 있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에 있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거죽엔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오렌지를 소재로 하여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사물의 내용적인 의미를 추구한 주지시.
*주제는 내면적 의미의 추구 자세.
<어떤 사람>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별을 돌아보고
늦은 밤의 창문을 나는 닫는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 없이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차갑고 뜨거운 그의 얼굴은
그러나 너그러이 나를 대한다.
나직이 나는 묵례를 보낸다.
혹시는 나의 잠을 지켜 줄 사람인가
지향없이 나의 밤을 헤매일 사람인가
그의 정체를 나는 알 수가 없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또 한번 나의 눈은 대하게 된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없이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을
나직이 나는 묵례를 보낸다.
그의 잠을 이번은 내가 지킬 차롄가
그의 밤을 지향없이 내가 헤매일 차롄가.
차겁고 뜨거운 어진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나와 만난다.
언제나 이렇게 나와 헤어진다.
*인간이 인간을 서로 신뢰하는 힘이 친화력이다. 그 친화력에 의해 인류를 하나의 동포로 느끼는 친교의 감정이 넘치고 있다.
*주제는 인간에게서 느끼는 친화력.
<표 정>
참으로 많은 표정들
가운데서
나도 일종의
표정을 지운다
네가 좋아하던 나의 표정이
어떤 것인지
내가 좋아하던
너의 표정이
어떤 것인지
다 잊어버렸다고 하자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고백만은
영원히 아름다운
약속 안에 살아 있다
픙화(風化)하지 않은
어느 얼굴의 가능을 믿으며
참으로 많은 표정들 가운데서
나도 임의의 표정을 지운다
표정이 끝난 시간을랑
묻지를 말라
창살 속에 갇히운
나의 노래를 위하여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독특한 존재 양식을 노래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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